제너럴 셔먼호
조선 고정 때인 1866년에 미국의 무역선인 제너럴 셔먼호를 대동강에서 불태운 사건이다.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은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의 관리를 납치하고 민간인을 죽이는 등 만행을 저지르다 평양 주민들의 공격을 받았다.
5만원권 그려진 그분에 대해 알아봅시다!
현모양처의 화신으로 기억되는 여류 화가
신사임당은 조선 중기의 여성 화가요 문사였으며,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유명하다. 신사임당은 연산군 10년(1504) 음력 10월 29일에 강릉에서 태어났으며, 명종 6년(1551) 음력 5월 17일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화가로서 이름이 높았는데 특히 포도와 풀벌레를 잘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임당이라는 당호는 ‘태임을 본받는다.’ 하는 뜻인데, 태임은 현숙한 부인의 전형으로 이름난 중국 고대 주 문왕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가족
신사임당의 아버지는 진사 신명화였으며, 어머니는 용인 이씨로 이사온의 따님이었다. 신명화는 평산 신씨로 중종 11년(1516) 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당시 윤은보나 남효의 등이 현량과에 천거하려 했으나 사양했다고 한다. 그는 용인 이씨와 결혼하여 아들 없이 딸만 다섯을 두었는데, 신사임당은 그 가운데 둘째 딸이었다.
율곡 이이는 자신의 외조부인 신명화의 행장을 지었다. 행장에는 성리학 의례를 엄격하게 준수하였던 선비의 모습 뿐 아니라 딸들을 교육시키는 데에도 힘썼던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신명화는 신사임당을 결혼시킨 해인 중종 17년(1522)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신사임당의 어머니인 이씨 부인은 그 뒤에도 계속 강릉에서 생활하였는데, 강릉은 이씨 부인의 어머니 쪽 집안인 최씨가 세거하던 지역이었다. 신사임당의 아버지는 처가의 세거지에 정착하였고, 어머니와 딸이 이어서 그 지역을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신사임당 또한 강릉에서 태어났고, 결혼 이후에도 상당 기간은 강릉에서 생활하였다. 그래서 율곡 이이도 강릉에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율곡 이이는 자신의 외조모인 용인 이씨의 묘지명을 지었다. 거기에는 외조모의 가계와 결혼 후의 일화가 실려 있는데, 이씨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던 일로 중종[조선]으로부터 정문을 받았다고 한다.
율곡 이이는 자신의 외조모가 남편을 살리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던 일에 대해 따로 「이씨감천기」를 지었다. 율곡은 자신의 외할머니에 대해서, ‘부부의 정이 두텁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어버이를 모시기 위하여 16년이나 떨어져 사셨고, 진사께서 질병이 나셨을 적에는 마침내 지성으로 빌어 하늘의 뜻을 감동시켰으니, 빼어난 사람의 행실과 옛사람을 초월하는 절의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신사임당은 중종 17년(1522) 이원수와 결혼하였고, 이선, 이번, 이이, 이우의 네 아들을 두었고, 조대남, 윤섭, 홍천우에게 출가한 세 딸을 두었다. 남편인 이원수의 자는 덕형이며 이름을 난수라고도 하였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벼슬은 사헌부 감찰에 이르렀다. 청송 성수침이 지었다는 이원수의 지문에 따르면, 이원수는 성격이 착실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너그럽고 겸손하여 옛 사람의 기풍이 있었다고 한다.
송시열은 이원수의 묘표를 지었는데, 『송자대전』 193권에 실린 감찰증좌찬성이공묘표가 그것이다. 송시열은 율곡이 동국 유학의 정통을 밝혀 이름이 후세에 전하게 되었으니, 율곡의 부친인 이원수 또한 이름이 길이 남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원수와 신사임당으로부터 이어지는 후손들의 가계를 상세히 밝혔다.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경세가이며 문신인 율곡 이이이다. 율곡 이이 때문에 이원수는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신사임당도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은 큰 딸인 매창과 넷째 아들인 옥산 이우에게 이어졌다고 한다. 매창은 시와 그림에 능하였으며, 이우는 거문고, 글씨, 시, 그림의 네 가지에 뛰어나 사절이라 불렸다.
출처 - 우리역사넷 -
척화비는 누가 세웠나요?
척화비
프랑스, 미국과 전쟁이 끝난 후 흥선대원군은 서방과 수교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굳건히 했다. 그래서 전국에 알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이것을 '척화비'라고 합니다.
흥선 대원군은 서판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을 때 싸우지 않으면 화의를 맺는 것인데, 화의를 맺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 정책은 나라의 문을 단단히 닫아 두 계급을 지배계급으로 하는 기존 사회를 보존하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아시아에 서양문화가 전래되었고 근대화 시기에 뒤처진 곳은 조선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구세력의 간섭을 막고 전통문화를 보존하는 우리 인민의 자주적 정신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김춘추에 대해 알고계신가요?~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는 어릴 때부터 마음이 넓었고 금위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유신에게는 두 명의 여동생이 있다. 그중 여동생은 김춘주와 결혼, 김유신과 김춘주는 더욱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신라가 삼국을 하나의 자랑스러운 국가로 통일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믿음을 굳건히 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의 잦은 분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싸움이 계속되던 어느 날, 김춘주는 백제의 공격으로 딸과 사위를 잃었다. 진춘추는 복수를 하기 위해 양가수문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고구려로 갔다.
진춘추의 뜻을 들은 용개 소원은 고구려의 마무현과 줄링을 돌려주면 백제를 물리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진춘추는 고개를 저었다.
"나라의 땅은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감옥에 가둡니다.
김춘추는 나가려고 했지만 선도해라는 남자가 자라와 토끼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왔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진춘주는 그녀의 무릎을 쓰다듬었다. 영수원에게 거짓말을 하더라도 먼저 신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김춘추는 연개소문에게 말했습니다.
"두 지역은 원래 고구려였으니 신라로 돌아가서 왕에게 돌려주라고 하겠다."
이 말에 속은 연개소문은 김춘주를 석방했다.
김유신이 전장에서 통일의 토대를 마련했다면, 김춘추는 뛰어난 외교 기술로 통일의 길을 닦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춘주는 신라의 힘만으로는 삼국을 통일할 수 없다고 믿었고, 이웃한 일본과 당나라의 도움으로 백제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팔만대장경의 가치
팔만대장경
대한민국 해천에 있는 해인사에는 13세기에 제작된 장장경 목판화가 8만여 점 있다. 국보 32호로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고려시대에 새겨져 있어 '장경'이라고도 하며, 목판이 약 8만 장에 이른다고 하여 '장경'이라고도 한다.
대경은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께서 세우신 종파의 규례, 발전, 규례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수필집입니다. 장경은 장경의 대량 인쇄에 사용되는 목판에 부조를 새긴 것을 말합니다. 한자로 쓰여있고 천자 단위로 만들어진 보관함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장경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장경일뿐만 아니라 구조와 내용면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고 배치가 매우 복잡하다고 평가했다. 장경이 소장되어 있는 건물인 장경판전은 보존 기술의 과학적 우수성을 인정받아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정성을 다했던 제작 과정
경전을 조각할 때는 먼저 산에서 나무를 베어 1~3년 동안 햇볕에 말리거나 소금물에 담가 발효시킨다. 그런 다음 에센스를 소금물로 찌고 몇 년 동안 그늘에서 말립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휘거나 갈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목판을 만들기 위해 조각하고 다듬을 수 있도록 크기를 자릅니다. 그는 판본을 만들어 새길 글자를 종이에 붙이고, 마지막으로 각 대가의 글자를 조각했다.
각 시트의 전체 길이는 68 또는 78cm, 너비는 약 24cm, 두께는 2.7~3.3cm입니다. 각 판에는 경전, 23행, 14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헤드보드의 재질에 따라 무게는 4.4kg에 달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3~3.5kg 정도입니다. 현재 보존된 불경은 81,352권이다. 목판은 주로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로 만든다.
한국 장경은 아름다운 서체와 정교한 조각 기술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북한의 저명한 작가 한시펑은 이를 "필기가 아닌 새로운 필체"라고 극찬했다.
이순신 그는 누구인가?
이순신(1545~1598)은 임진왜란의 영웅이다. 거의 일방적으로 일본이 점령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전쟁에서 이순신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무패 전투의 주역이었다.
이순신의 고향은 충청남도 아산이지만 자신이 태어난 서울 건천동 자택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류성룡(1542~1607)은 '경비'에 이순신이 어려서부터 위인의 자질을 가졌다고 썼다.
1576년 이순신은 32세의 나이에 무예과에 합격한 뒤 광지 수련원에서 의용병으로 복무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47세에 전라남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순신은 전쟁 준비를 위해 좌수영을 거점으로 거북선을 만들고 군수품 확보에 힘썼다.
당시 조선 최전선의 대부분은 판옥선으로 배의 갑판을 덮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1층에 노를 저어 타는 전투선입니다. 거북선은 판옥선 위에 다시 철갑옷을 얹은 거북 모양이다. 또한, 용 머리 모양의 전면에는 총신을 쏠 수 있는 구멍이 있어 용의 입에서 불을 내뿜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임진왜란 때는 거북선이 적군함 사이를 오가며 아군 피해를 최소화하고 적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틀 만에 부산 동래가 함락되자 몇몇 조선 장성들이 겁에 질려 달아났고 일본군은 북한 해군과 한 번도 교전하지 않고 이 해역을 점령했다.
이순신은 즉시 전선을 수리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이순신은 옥포 앞바다에 적함 30여척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곧바로 달려갔다. 일본군은 조선 해군이 바다에서 공격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해서 해안으로 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했다. 이순신 장군의 수군이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탈출을 시도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순신의 수군은 일본 선박 26척을 격파하고 많은 일본군을 무찔렀다. 이 전투는 유푸 전투입니다.
이후 노량해역에서 많은 일본군이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가장 먼저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분명히 인정받았다. 거북선이 이끄는 이순신의 수군은 당포, 당항포, 앙포, 반산도에서 잇따라 해전을 승리로 이끈다.
이순신은 몇 대의 판옥선으로 일본 수군을 공격하고 반산도 인근 바다로 유인한 뒤 맹공으로 학익진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은 세계 대전의 역사에 기록된 반산도 전투입니다. 반산도 해전은 진주성 해전(1592.10.5~10), 흥주 해전(1593.2.12)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해전 중 하나이다. 이 전투는 지상에서의 연속적인 패배로 의기소침해진 조선군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1593년 이순신은 남해안의 모든 적군을 전멸시키고 진영을 반산로로 옮기고 미시마 해군의 삼도수군통제사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가 참전했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평화협상으로 전쟁은 돌연 종식되는 듯했다. 이때도 이순신은 군사훈련과 군비강화, 피난민의 생계유지 등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의학정리책 동의보감
의학지식의 정리본
"동이보감"은 1610년에 완성되어 1613년에 목활자로 인쇄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의학서입니다. 이 책의 주 저자는 허준(1539-1615)이다. 책의 제목인 '동의'은 한의학의 전통과 남과 북의 전통이 함께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북한의 의료 전통을 의미합니다. '보감'은 '보배로운 거울'이라는 뜻으로 '가치 있는 본보기'라는 뜻이다. 허준은 그를 "동의보감"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는 한국의 전통을 계승하고 한의학 및 한의학의 표준을 설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동이보감" 편찬은 선조의 명으로 시작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로 도피한 선조는 온 힘을 다해 전쟁에서 회복하기 위해 서울로 돌아왔다. 그 일환으로 1596년에 선조는 허준에게 새로운 의학서를 쓰도록 명령했다. 민간에서 사용하던 거의 모든 의학 서적들이 전쟁 중에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명원, 양예수, 김응탁, 정예남 등 6명이 집필에 참여했다. 하지만 결국 허준이 혼자 집필했고 완성하는 데 14년이 걸렸다.
"동의 보감"이 완성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첫째, 1597년에 목록이 막 만들어졌을 때 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작업에 관련된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동의 보감"의 작업이 중단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601년, 선조는 서준을 불러 왕실 소유의 고대 의학서와 현대 의학서 500여권을 주고 혼자 『동이보감』을 완성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내과로 바빴던 허준은 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선조의 죽음에 대한 벌로 허준은 의주로 유배되어 '동이보전'을 집필하는 데 전념했다. 1609년 말에 귀양에서 풀려난 후 서준은 '동이보전'을 완성하고 이듬해 8월에 광해군에 봉헌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 직후에 출판될 수 없었고 인쇄판은 3년 후인 1613이 되어야만 인쇄본이 출판될 수 있었다.
민족을 위한 의학서
동의보감은 의학 내용 23편과 목차 2편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내경편, 외형편, 잡병편, 탕액편, 짐구편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경편에는 신체 내부와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고 외형편에는 신체 외부와 관련된 지식들이 담겨져 있었다. 잡병편에는 질병 이론과 질병의 정의가 담겨있었고, 탕액편은 약에 관한 이론과 구체적인 약물에 대한 지식이, 침구편에는 침과 뜸에 대한 사용방법등이 실려있었다.
개항의 시작
위정척사
"개항"이란 외국 선박이 입출항할 수 있도록 특정 항구를 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사적으로 외국과의 외교관계 수립 및 무역관계 수립을 의미합니다. 1876년 이전에 조선은 나라를 잠그고 서양인을 오랑캐라 업신여기며 거부해왔다. 위정척사는 본래 말은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배척한다는 뜻이며, 위정척사 군은 성리학에 기초한 질서는 옳고 서구적 사고는 틀렸다고 믿었다.
한국의 첫 개항의 직접적인 계기는 일본의 침략으로 체결된 '강화도조약'이었다. 강화조약의 정식 명칭은 환자 보호조약이라고도 하는 9일 보호조약이다. 실제로 조선의 개항은 일본군의 위협으로 시작됐지만, 우리 사회의 대외개방 열망은 이미 그 이전부터 싹트고 있었다.
개화를 원한다!
개항을 앞두고 서학도와 북학론자 간의 개방 열망이 싹트고 있었다. 북학은 중국의 선진 학문을 말하며 서양학은 천주교를 시작으로 하는 서양학을 말한다.
북학론자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박지원(1737-1805)은 이미 정조 시대에 서예의 도입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또한 실천적 학문의 정점인 정약용(1762~1836)은 기술 문화와 서구 세계의 연결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반면에 박해받고 억압받는 가톨릭 신자들은 종교의 자유를 위해 북한에서 서구의 영향력이 작용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조선 26대 왕인 고종황후를 중심으로 한 민씨가 집권한 이후에야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개항의 시작 2편
일본의 도발
그 이전에 일본은 1868년에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여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 조선과 근대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교섭을 계속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여러 사정으로 이를 거절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사임하자 조선의 계몽 세력이 대외개방을 적극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인지한 일본은 포병훈련을 명목으로 조선을 위협하기 위해 군함 3척을 부산항에 파견했다. 또한 운요호는 서울 근교 강화도로 파견되어 조선군의 발포를 유도하였다. 운요호를 막으려던 조선의 수비병들은 일본군에 패하고 말았으며, 강화도의 초지진과 영종도에 상륙했습니다. 일본군은 영종진에서 발포, 살상, 약탈을 하고 후퇴했는데 이것이 바로 운요호사건이었다.
조선인의 도발을 무시하고 이번 사건에 대해 조선에 사과를 요구했다. 일본은 사과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조선 영해의 무료 항행과 강화 인근 개항을 제안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기회로 무력을 동원해 협상을 강력히 요구했다. 마침내 1876년 2월 3일(음력) 전권대신인 신헌과 특명전권판리대신 전권대사 구로다 기요타카가 12조의 조일수호조규 맺었다.
불평등 계약의 시작
개항 이후 민씨 정권은 적극적으로 일본과 청나라의 문을 열려고 했고,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보냈다. 그러나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일본과 관세가 없는 무역이 이루어지고 서구 상품이 쏟아져 들어왔다. 관세 없는 서구 상품은 조선의 장인 계급을 무너뜨렸고, 식량과 금은의 유출은 가격을 치솟게 했다. 계속되면서 농민, 중소 상인, 장인의 계층 무너졌다. 특히 쌀 수출은 농민층의 쇠퇴로 이어졌다.
개항 후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고 인민생활이 어려워지고 개항 이전에 존재했던 봉건지주계급과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갈등은 사회 개혁에 대한 요구로 밝혀졌고, 이는 농민 봉기로 이어졌습니다.
조선의 개항은 황실의 국내 학자들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의 공격적인 군사외교라는 대외환경이 개항 자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발생한 불평등 조약은 조선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뿌리를 뒤흔드는 기회를 제공했고, 이는 결국 일제의 침략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큰게 무덤이였어?
피라미드, 만리장성, 스톤헨지와 같은 고대 유적은 흔히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합니다. 한반도에 나란히 설 수 있는 유물도 있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고인돌에 불과합니다. 한반도 전역에 약 40,000개의 고인돌이 흩어져 있으며, 이는 세계 전체 고인돌 수의 거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비석은 인골, 석기, 옥, 청동제품 등 다양한 문화유물과 함께 출토되었다. 그러나 건설 당시의 기술을 외삽하여 고인돌의 존재는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고인돌은 모양에 따라 탁자형 고인돌과 바둑판형 고인돌로 나뉩니다. 탁상형 고인돌은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땅에 4개의 돌을 쌓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은 무덤이다. 바둑판식 고인돌은 땅속에 묻힌 무덤을 돌로 쌓아놓은 것으로 한반도 남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고인돌은 흔히 무덤이라고 불리지만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12세기에 고려 학자 이규박이 묘비를 보고 놀라 그의 책에 썼다. "전 세계 사람들이 비석을 고대 성인의 정체라고 하는데, 이것은 묘한 기술입니다." 20세기 초 미국 선교사인 호레이스 언더우드는 고인돌이 무덤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믿었지만 제물로 바쳐졌다. 한국의 민속학자 순진태도 한국의 전설에 나오는 거인 마고할머니(또는 마귀할머니)가 살던 집이 돌무덤이었다는 민속학을 소개하고 제단이라고 주장했다.
고인돌은 만주를 제외하고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거의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 분포하며, 바람과 비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 동안 한국인과 함께 살아왔다.
이것이 널리 알려지면서 전 세계 학자들은 인류 문화사에서 한국 고인돌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2000년에는 전라남도의 인천과 숭강화 고인돌과 전라북도의 고창 고인돌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강감찬에 대한 정보
강감찬은 고려 서북면 행영도 통사, 상원수 대장과 문학정을 역임한 문신이다. 948년(정종 3년)에 태어나 1031년(선종 22년)에 사망하였다. 1010년(현종 1년) 요나라가 시경에 입성하자 일시적으로 후퇴를 주장했고, 1018년(현종 9년)에 요의 병사들이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구주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상원수 장군. 구주대첩이라고 하는 이 대승리 후 요와 평화로운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국방을 강화하고 대외 관계에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광복절에 대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기념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을 경축하는 날이다. '빛을 되찾다'라는 뜻에서 '광복'을 사용하여 잃었던 국권의 회복을 기념한다.
하멜 표류기
제주도에 도착한 이방인
1653년 조선 17대 효종 때 네덜란드 상선 스페로 호크호가 제주도 산방산 앞 바다에 표류했다. 폭풍우로 배가 심하게 파손되었고 선원들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13년 28일 동안 조선에 잡혀 있었다. 그중 8명은 일본을 거쳐 네덜란드로 탈출했다. 귀환한 선원들 중에는 헨드릭 하멜이 조선에서의 생활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은 "하멜 표류기"입니다.
하멜은 표류 중 조선에 대한 그의 도착과 생활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1653년 1월 하멜과 그의 일행은 포겔 스트루이스호를 타고 네덜란드를 떠나 6월에 자바의 바다비아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대만행 스페로 호크에 탑승하기 전에 그곳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이것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명령에 따라 새 총독을 자신의 직위에 임명했습니다. 그들은 대만에 도착했을 때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7월 말 나가사키로 떠난 스페로 호크는 폭풍우로 인해 보름달을 뜨기 위해 바다 위에 머물러야 했다. 그들이 절망의 상태로 표류했을 때, 선원은 육지를 발견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제주도 남해안입니다.
붕괴하는 동안 격렬한 폭풍이 몰아쳤고 스페로 호크호는 침몰했습니다. 승조원 64명 중 28명이 사망하고 36명만 살아남았다. 그들은 제주도, 서울, 전라도에서 구금되었다. 한편 20명이 숨지고 16명이 생존했다.
하멜의 조선 생활기!
그들보다 먼저 네덜란드 벨테브레가 1628년에 표류했습니다. 벨테브레는 훈련소 작업을 하면서 명나라에서 수입된 홍기포를 만들고 제어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등 조선에 선진 서양 문화를 가르쳤습니다. 1653년 하멜 일행이 제주도로 표류했을 때 벨테브레는 번역을 위해 제주도로 갔다. 그 후 그는 3년 동안 그들과 함께 머물면서 그들에게 한국어와 관습을 가르쳤다. 조선에서 하멜과 그의 팀은 벨테브레와 동일한 효용 가치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하멜과 일행들은 잡일밖에 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하멜과 그의 일행이 처음 조선에 왔을 때 그들은 대부분 배 위에서 간단한 심부름을 하는 십 대 소년들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14년 동안 병역, 투옥, 매질 등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지방 관료들은 이들을 돌보지 않고 구걸로 연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끌려다니면서 당시 조선의 다양한 풍습과 풍습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풍부한 경험과 관찰이 "하멜 표류기"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탈출 직전 전라남도 여수시 좌수영에서 생존자 16명 구금되었었는데, 그들은 조수와 바람의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작은 배를 타고 먹이를 찾아 가까운 섬을 돌아다녔으며, 탈출을 위한 재료를 구하기 수월하였다. 그들은 또한 의도적으로 앞뒤로 움직여 보트를 쉽게 감시할 수 있도록 보트를 노출시켰습니다.
하멜이 남긴 조선의 모습들
1666년 9월 16명 중 8명만이 탈출을 시도했다. 그들 중 누구도 노출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탈출할 수 없습니다. 탈출에 성공한 그들은 1668년 7월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습니다. 2년 후 나머지 8명도 북한 정부의 인도적 배려로 석방돼 네덜란드로 송환됐다.
하멜은 동인도 회사에 13년 이상 미지급된 임금을 청구했고, 이때 그는 표류의 증거로 "하멜 표류기"를 제출했다.
"하멜 표류기"는 1668년 암스테르담에서 동시에 3개의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으며, 그 후 프랑스, 영국, 독일 및 기타 유럽 국가가 번역 및 출판을 위해 경쟁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난파선과 표류에 대해 쓰고 두 번째 부분은 "조선의 왕"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지리, 정치, 군사, 관습 및 교육을 소개합니다. 하멜은 '조선왕조'에서 오독을 많이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17세기 한국 사회의 실상과 당시 조선인들의 일상, 풍습, 풍토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조선이 유럽 사회에 진출한 최초의 기록으로, 현대 한국 사람들에게 조선의 중도를 객관적으로 소개하는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일본 국모 시해 사건
혼돈의 조선사회
고종은 조선의 26대 왕이자 1897년 대한제국을 세운 최초의 황제이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조선에서는 많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개항으로 조국의 문이 열렸고 이 기간 동안에도 번영과 독립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일본의 명성황후 고종 황후 살해도 이 시기에 일어났다.
을미사변(1895)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갈등하는 세력의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의 다양한 혼란과 함께 청나라가 조선에 미친 영향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조정에 대한 청나라의 강력한 영향력에 저항한 갑신정변(1884)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개화당이 일으켰다.
가진 쿠데타의 결과 일본은 청나라와 천진 조약을 체결하여 동설 농민 운동(1894) 동안 청나라와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 진입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청일전쟁(1894-1895)은 두 군대의 대결로 촉발되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중국의 요동반도를 전리품으로 삼으려 했다. 일본의 팽창을 막기 위해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개입했고 일본은 요동반도를 포기했다. 이후 러시아를 중국이나 일본보다 강대국으로 보고 있는 북한은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일본은 3자 개입의 영향으로 북한에 친러 내각을 구성하면서 위기를 느꼈다. 북한을 점령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헛수고였으며 러시아가 그들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을미사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는 외세와 러시아의 협력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하는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친러파 대신들을 자주 궁으로 초청했다. 일본에서 친러시아 내각의 중심인물은 명성황후다. 고종에게 큰 영향을 미친 명성황후를 죽이면 고종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1895년 8월 20일 일본은 "여우 사냥"이라는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 명성황후 살해의 책임을 돌리려 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왕후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복궁을 공격하기 전에 흥선대원군을 강제로 경복궁으로 향하도록 하였으며, 이는 시아버지가 조선 왕실의 며느리인 아내를 살해하게끔 꾸미려는 의도였다.
일본 폭도들은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새벽에 그들은 왕과 그의 가족이 잠든 궁궐을 습격하여 왕비의 석방을 요구하며 방을 뛰어다녔습니다. 한편 왕자는 폭도들에게 등을 맞아 기절한다. 고종왕은 손도 대지 못하고 왕비가 죽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폭도들은 궁녀 복장으로 갈아입고 병풍 뒤에 숨어있는 명성황후를 발견했다. 그러고는 그를 건청궁 뒤뜰로 끌고 가서 칼로 찔러 죽인 다음 담요로 싸서 건청궁 옆에 있는 녹산으로 끌고 가서 기름을 부어 불태웠다.
발뺌하는 일본
일본은 을미사변 사건이 일본 정부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왕비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한 이들은 도적뿐 아니라 일본 외교관, 일본 신문사 사장, 일본 군사 고문 등 고위 관리직이었다. 왕비와 충돌한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소 사이의 음모로 사건을 위장하려 했으나, 고종과 러시아 샤바틴, 미국 다이 등 많은 목격자들 덕에 사건을 은폐하지 못했다.
만행을 목격한 외국인들은 외교관들에게 진실을 폭로했고, 미군 장교 대행 앨런과 베버 주재 러시아 대사 대행은 군인들을 동원해 항의했다. 게다가 일본이 지지하는 김홍지 내각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움직임도 보였다.
이러한 당혹감을 본 일본은 관련자를 정식으로 처벌하고 관련자를 체포하여 히로시마로 보내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미우라를 대신할 다카무라 유키무라를 한국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일본 정부는 미우라를 포함해 약 40명을 본국으로 불러 재판을 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을미사변 2년 후, 명성황후의 장례는 정상적으로 치러질 수 있었다. 암살을 두려워한 고종은 경복궁을 탈출하여 일본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 대사관으로 갔다.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가 된 고종은 왕비를 위해 아내의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훼손된 시신을 제외하고는 손가락뼈와 의복 조각만 넣어 왕비의 무덤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실력 양성 운동
다양한 투쟁방법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한일합병조약'을 발표하면서 조선민족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후 35년 동안 조선민족은 일본의 강제통치 아래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지배를 피하기 위해 국내외에서 목숨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당시 세계사의 흐름에 더해져 1945년 8월 15일 조선민족이 해방되었다.
해방이 되기까지 독립운동은 국내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1918년 2월 8일, 유학생을 중심으로 도쿄가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이듬해 3월 1일 캠페인의 즉각적인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1919년 한국에서만 1,500회 이상의 독립 집회와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중국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응하여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무장독립단체가 결성되어 항일무장투쟁을 본격화하였다.
안창호의 실력 양성 운동
한일합병협정 전후에 수백 개의 교육기관이 국내외에 설립되었다. 이들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학교에서는 신학교육뿐 아니라 민족의식과 자주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하였다. 안창호는 대표적인 교육운동가다.
안창호는 교육을 통해 국가 혁신을 달성하기 위해 "기술 훈련 캠페인"을 시작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그는 "나를 건강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나라를 건강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 중 '무실'은 진실을 위해 노력한다는 뜻이고, '역행'은 힘써 행하자는 뜻이다. 그는 진진학파, 대성학파, 동명학파 등의 학교를 설립하고 흥단운동을 통해 '애국도덕인 양성'의 교육철학을 실천하고 독립운동에 힘썼다.
연개소문
삼국시대에 고구려 사람들은 고구려 후기의 대표자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동부대학교의 후손인 연태조로 동부대학교의 지위를 계승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642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과 반대하는 귀족들을 죽이고 구장왕을 세우고 다마스쿠스 정부에 올랐다.
이후 고구려, 신라, 당 사이에 여러 차례 전쟁이 일어나 연개소문은 신라와 당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 연개소문은 생전에 계속해서 승전을 하였지만, 사후 668년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 원인이 된 세 아들 간의 다툼이 그의 죽음 이후에 일어났다.
왕 암살과 횡포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정치적 재능은 무시하기 어렵고, 그는 죽기 전에 혼란스러운 정치 세계를 진정시키고 강력하게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당시 세계 제국인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는 당대 가장 뛰어난 장군 중 한 명으로, 태종 이세민과 소정방 총사령관에게 처참하게 패배를 안겨 줄 정도였다. 신채호가 '조선상고사'를 쓸 때 복원하고 싶었던 것은 연개소문이었다.
을지문덕
을지문덕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세력이었던 수나라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적의 야전군을 퇴각시키는 대신 전멸시켜 고구려를 대승리로 이끈다. 두말할 나위 없는 전쟁영웅이 없는 병역과 업적이다. 현대 대한민국이 미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 대한민국의 장군이 미국의 최고 엘리트로 뽑힌 미국인들과 싸워 그들을 막을 뿐만 아니라 노골적으로 전멸시켰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당시 고구려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의 중국의 위상은 현대 미국과 견줄 만했고, 당시 어느 나라에서도 압도적인 국력을 갖고 있었다. 이 나라가 통치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왕국이었던 것은 이유가 없습니다. 을지문덕 장군은 그런 나라의 군대를 말 그대로 전멸시키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여러 번 찬사를 받은 위대한 업적임에 틀림없다. 이순신 장군에 비하면 그 밖에도 많고, 삼국무장도 감간찬을 비롯한 세 인물에서 따온 것이다.
백년 전쟁
14~15세기에 걸친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으로, 왕위 계승 문제로 충돌하면서 시작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강력한 왕권을 가지게 되었고, 국민들이 조국에 대해 자부심을 강하게 느끼게 되며 민족의식이 성장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정확히 116년의 기간 동안 진행되었으며, 물론 그 긴 시간동안 여러 차례 휴전과 전쟁을 반복했으며, 흑사병으로 인해 전쟁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4.19 혁명 정의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을 중심으로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이다. 이승만 정권이 불법적인 개헌으로 12년 동안이나 장기 집권하였고 또다시 3.15 부정선거로 이승만이 대통령직에 당선되자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이에 정부는 총격과 폭력으로 강제 진압에 나서 무고한 학생과 시민을 공산당으로 몰며 고문하였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4월 11일 마산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 군의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제2차 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4월 19일 전국적으로 총 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쳤다.
아편 전쟁
영국과 청나라 간의 전쟁이며 중국산 홍차를 수입하는 양이 늘어가던 영국은 영국의 은이 대량으로 중국에 흘러들어가자 이를 개선하기 위해 인도산 아편을 중국으로 대량 밀수하게 했다. 그러자 중국에는 아편 중독자들이 늘어났고 영국은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이에 중국 광저우에 있는 영국 상인들로부터 아편을 빼앗아 불태웠고, 영국은 이 일을 빌미로 중국을 공격했다. 결국 1842년 난징조약을 체결하며 이 조약으로 홍공이 영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
전라도를 중심으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이다. 과도한 세금과 관리들의 수탈로 인해 어려움을 겪던 농민들이 벌인 사회 개혁 운동이다. 당시 곡창지대로 기름진 곡식이 많아 그만큼 수탈도 잦았던 전라도 농민들은 외세의 개입에 깊은 불만과 두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그에 대비되는 '동학'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이 핵심인 동학에 많은 매력을 느꼈다. 전봉준 장군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도들이 난을 주도하였고, 농민들은 쉽게 그 뜻을 함께할 수 있었다. 이는 곧 팔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조선 정부도 더 이상 개혁을 미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균관은 뭐하는곳이죠?
성균관
성균관은 유교 교육과 문화 의식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다루는 기관입니다. 성균관에서는 서울과 다른 지방, 진사와 영관에서 온 학생들이 교양 시험을 볼 목적으로 열심히 공부하기 위해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또한, 학교는 중국과 한국의 유교 학자들을 위한 묘지를 세우고 교황을 집전했습니다. 따라서 성균관의 관리들은 유교를 가르치는 교육자일 뿐만 아니라 제사를 담당하는 승려이기도 하다. 고려 말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1894년 개헌까지 500여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유교의 정수를 전파하는 국내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유교 정신 전수
"경국대전"에 따르면 성균관의 의무는 유교를 가르치는 일을 감독하는 것입니다. 고려시대 인문집은 주로 인재 양성을 위한 것이었으나 성균관은 인재 양성뿐 아니라 교육과 예절의 기능을 제고하였다. 이는 성균관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성균'은 '잘정되지 않은 사람을 완성하다'라는 뜻의 '성인재지미취'와 '불의를 제거하는 풍습'을 뜻하는 '균풍속지부제'의 두 문장의 첫 글자에서 따왔다. 즉, 이름에서 인재 양성, 풍속 교화의 기능을 제안한다.
따라서 조선의 성균관은 두 가지 기능을 하였다. 첫째, 과학을 연구하고 전파하는 문화의 중심지이며, 둘째, 공무원과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의 발상지입니다. 특히 신유학의 보급에 있어서는 유교의 선행을 위해 성균관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성균관의 공간 배치에도 반영된다. 즉, 문탄의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 공간과 명륜당을 중심으로 한 교육공간이 완전히 분리된 것이다. 성균관의 기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 교육적 기능이다.
일상교육은 강의와 시연으로 나눌 수 있다. 강학은 말 그대로 유교의 상류층과 하류층을 위한 학문을 배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연은 평가 결과에 따라 유충에게 이익을 주는 시험을 말합니다. 황감과 중앙이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황감은 특히 제주도에 황감마가 출현할 때 실시하는 수시시험으로, 유충은 1년에 4번 정강시험을 하여 다양한 효능을 얻는다. 과거에는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쉽게 시험을 볼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즉, 과거에 정규시험을 통해 채용했던 일반 2반과 달리 성균관대 학생들은 별도의 비정기 시험을 통해 관리자를 채용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됐다.
성균관의 교육적 기능은 오늘날과 같이 유교생들이 매일 담임교사에게 정규수업을 듣게 되므로 오해받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정된 교육이 없습니다. 유교생은 스스로 공부하고, 필요할 때 담임교사와 학습 내용을 논의하거나 보고합니다. 따라서 과거에는 강의하는 기능 외에 학생들을 평가하고 시험을 통해 공무원으로 선발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두 번째는 고분군을 중심으로 한 의례적 기능이다.
규칙적인 석전과 삭만전과 불규칙한 의식이 있다. 석전은 매년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거행되는 가장 중요한 제사이며, 무덤을 헐거나 수리할 때 제패를 옮겨 제사를 지내는 등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성균관에는 신라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공자와 후궁, 중요한 성인을 모시는 대성전과 동동무가 있다. 이곳은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져 한국의 민족사상인 유교를 발전시킨 사람들의 위패를 모신다. 성균관은 이 현현인들을 위한 예배와 각종 의식의 장소이자 행사를 주관하는 본체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성균관은 교육과 조상의 기능을 겸비한 조선 최고의 교육 기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성균관이 다양한 특권으로 인해 학문적 연구 대신 경력개발의 도구로 활용되어 교육의 기능이 저하되었다. 이에 여반도 서원을 중심으로 한 사립학교를 부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균관은 우수한 교원들로 구성되어 국내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인정받고 있어 누구나 입학할 수 없었다.
마구니가 끼었어 1편
지금이 기회
889년 신라 말기의 정치적 혼란과 중앙정부의 몰락으로 전국에서 난이 벌어졌다. 궁려는 승려이지만 규율과 용기가 있으며, 이 혼란스러운 시기를 틈타 무리를 모아야 내 뜻을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절을 나왔다. 891년에 그는 죽주에서 자리 잡고 있던 기훤에게 의탁을 맡겼지만 그의 실패에 만족하지 못했다.
양길은 기훤과 달리 공예의 재능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병력을 나누어 동부 지역을 공격했다. 그래서 강원도 원주의 석남사에 머물면서 주천, 나성, 울오, 어진 등을 정복하였다. 이 지역은 지금의 강원도 평창군 영월군과 경상북도 울진군에 해당한다.
진성여왕 (894)은 명주를 함락하였으며, 이때 야전군은 3,500명에 이르렀고 14개 부대로 편성되었다고 한다. 명주의 점령은 궁예의 진보의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다. 명주는 신라 김경신(원성왕)과의 왕위쟁탈전에서 쫓겨난 김주원 일가가 머물며 다스리던 중요한 지역이다. 명주를 얻은 공예는 부하들에 의해 장군으로 진급되었고, 이때 장군 또는 성주라는 칭호는 독립 지방의 귀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들이 양지로부터 독립한 독립 세력을 형성했음을 나타냅니다.
궁예는 이 상황을 틈타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고 강원도 인제군, 화천군, 진화군, 철원군 일대를 함락시켰다. 사실상 강원도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세가 성장함에 따라 황해 지방의 일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항복했으며, 궁예는 자신을 왕으로 선포하고 정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중앙 및 지방 정부에 관청을 설치했다.
896년에 궁예는 승령현과 임강현을 공략하여 현재의 황해로와 경기도를 영향권에 포함시키고 송악을 수도로 삼아 주변 지역을 통제하였다. 그 결과 897년에는 지금의 서울권과 인천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궁예의 힘이 강해지면서 궁예의 전 상사인 양지와 충돌하게 된다. 당시 양기는 북원과 권원(지금의 충청북도 충주) 등 30여 개의 성을 점거하고 있었다. 양지는 궁예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집결시키려 했으나 선제공격을 받아 패하고 기력을 잃었다. 900년에 궁예는 왕건을 보내 지금의 경기도 남부와 충청 북부를 정복하게 했다.
자칭 미륵불
901년에 궁예는 마침내 후기 고구려를 세우고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했다. 904년에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바꾸고 무태를 국호로 바꾸고 수도는 철원으로 하였다. 궁예의 위신은 더욱 위엄이 있었고, 그 후에도 세계 각지의 유력한 귀족들은 계속 널리 알려졌다. 남쪽은 현재 경상북도 상주지역과 충청남도 공주지역을 포함하고, 북쪽은 대동강 이남의 황주 지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911년에 국호를 태봉으로, 연호를 905년에서 성책로 바꾸었다.
이 기간 동안 나라의 영토가 확장되고 궁예의 얼굴은 거칠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군주로서 심각한 위험에 처해있었다. 광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하였고, 그의 아들들은 청광보살과 신광보살이라고 불렀다. 의상과 행진은 매우 휘황찬란했고 그는 스스로 경전을 만들었습니다.
미륵불은 현재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따라 미래의 중생을 구원하는 부처입니다. 궁예는 미륵불을 자칭하고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얻은 권위를 정치 경영의 원동력으로 삼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궁예의 힘의 불안정함도 드러냈다. 짧은 시간에 국명이나 연호가 자주 바뀌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건국 이후의 세대들은 다른 귀족들과 달리 지리학적 기반이 뚜렷하지 않아 건국 이후 정부를 관리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최초의 수도인 송악을 떠나 철원으로 이동한 뒤 송악 등 패서 지역의 세력을 견제하는 의미도 담았다고 한다.
마구니가 끼었어 2편
마침내 915년, 인간 궁예에게 닥친 어둠이 드러났습니다. 왕후인 강씨는 궁예의 악행을 지적하자 왕비의 간음을 발견하고 잔인하게 살해하고 두 자녀까지 죽였다. 이후 의혹과 분노가 고조되어 신하들을 죽일 뿐만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을 더 자주 살해하고 대중의 마음도 업계를 떠났다.
그래서 918년 왕건은 중장으로 진급하여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호응하여 차례로 궁으로 몰려와 그제야 궁예는 북문으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결국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난관에 봉착한 지 28년, 건국 18년이 되었을 때 일이었다.
왕 앞에서의 공적 업무는 왕비의 공적 업무와 매우 다릅니다. 왕이 되기 전 궁예는 신하들과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상벌에 무자비하여 만인의 마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왕이 된 후에도 그의 성격은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 힘든 사치스러운 모습, 잔인함, 의심, 낙심 등 대지를 뒤흔드는 변화를 겪었기에 백성들은 등을 돌린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묘사는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들 때문에 어느 정도 왜곡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치적 비합리적 요인이 왕조의 파국적 붕괴에 기여했음이 분명하다. 궁예는 뚜렷한 정치적, 지역적 기반 없이 왕위에 올랐지만, 자신의 기반이 충분히 강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며, 그래서 자신을 신격화하여 강력한 왕권을 얻으려 했으나, 그 과정에서 권세에 도전하거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가까운 사람들까지도 무자비하게 숙청을 하였다.
이제는 수학여행지가 아닌 불국사
사적 및 명승 1호 불국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의 귀족 김대성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8세기 중반. 목조 건물과 석조 플랫폼은 서로를 보완하며 통일신라에서는 불교 예술의 정수로 간주됩니다. 불국사는 당시 불국토를 실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염원을 반영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불국사는 조선 초기까지 중건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일부 탑과 석탑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다. 1805년까지 부분적으로 보수된 것으로 보이지만 신라 시대의 모습으로 복원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는 총 2번의 복원이 이루어졌고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살수대첩
양제의 진격
612년, 양제는 1,133,800명의 군대와 군량 운반자가 실린 배를 이끌고 직접 고구려에 맞서 싸웠다. 그 후 그는 고구려의 현 영토가 원래 중국 땅이고 고구려가 거란과 말갈의 일부를 흡수한다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수나라가 고구려에 간 이유를 다른 나라의 길을 막고 고구려의 세금이 많고 백성들이 흉년과 기근에 시달렸다는 이유를 밝혔습니다.
2월에 유수에 도착했을 때, 양제가 공부상서 우문개에게 강을 건너기 위해 부교를 건설하도록 명령했지만 부교가 짧았고 고구려 군대가 기회를 노리고 공격했다. 다시 소부감 하조에게 다리를 뻗고 요하를 건너 고구려 군을 무찌를 것을 명했다. 그 결과 요동성 지역에 체류하면서 전진하지 못했다.
양제는 군의 진격을 자신에게 보고하고 그의 결정에 복종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수군이 신속하게 대응하고 전쟁을 처리하기 어려웠다. 이에 대해 고구려는 모든 것을 결정한 지휘계통을 역이용하였다. 수군이 양계의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고구려 군은 전선을 배치하고 방어체계를 완비하여 요동성도 수군에게 쉽게 함락될 수 없었다. 수군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양제는 기량을 강화하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네가 죽음을 두려워하여 전력을 다하지 못하니 내가 너를 죽일 수 없느냐”라고 말했다.
수의 지휘부 분열
결국 수의 군대는 전투 방식을 바꿔 해군과 군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진군하기로 했다. 첫째, 좌익위대장군의 내호아는 해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평양까지 60리까지 진격했다. 도법에 따르면 부사령관은 군대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겠다고 말했다. 고구려군은 누명을 쓰고 수군을 유인하여 공격했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몇 천 명에 불과했다.
육군은 9군으로 나누어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 좌효위대장군 형원항은 요동도, 우익위장군 설세웅은 옥저도, 좌둔위대장군 신세웅은 현도도, 우어위대장군 장근은 양평도, 우무후장군 조효재는 갈석도, 탁군태수 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은 수성도, 검교우어위호분낭장 위문승은 증지도로 향하여 모두 압록강 서쪽에 모였다. 긴 원정로를 통과하면서 군사들은 지쳤고, 미리 지급받은 군량이나 무기류 등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급기야 몰래 군량을 버리는 자들도 많이 생겨나 중도에 군량은 이미 바닥이 난 상태였다.
허를 찌른 살수에서의 전투
수군은 고구려 군과 하루에 일곱 번씩 싸워서 일곱 번 모두 이겼지만, 이것은 을지문덕의 고의적인 패배였다. 군사력이 부족한 병사들은 전투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쳐갔다. 이때 을지문덕이 유정에게 시를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령한 계책은 천문을 다하였고,
신묘한 계산은 지리를 다하였다.
싸움에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란다.
을지문덕은 우중문을 축하하는 척하며 군대의 퇴각을 격려하는 시를 보낸다. 또 다른 전령이 우문술에 보내어 다시 항복하고 수군이 물러나면 영양왕과 함께 황제를 만나겠다고 하였다. 우문술은 평양의 방어가 튼튼하고 지친 병사들 사이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을지문덕의 항복을 구실로 귀환을 결정했다. 그러나 느닷없이 고구려 군이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공격에 대비하여 사방에서 적을 수호하는 방진의 대형을 결성하여 후퇴하였다. 7월에 수군은 살수에 상륙했고, 수군이 강을 건너자 미리 숨어 있던 고구려 군이 반격했다. 9군 정예병력 30만 5000명 중 2700명만이 요동으로 귀환했다고 한다.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 순수비는 신라 진흥왕이 새로 개방한 국경지대의 청정을 기리기 위해 곳곳에 세워진 비이다. 대부분이 자연석에 조개껍데기가 새겨져 있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경남 창녕의 창녕비, 북한산 북한산비, 함경남도 함주 황초령비, 함경남도 이원의 마운령비 등이 있다. 이 묘비들은 신라의 정부와 계급제도, 사회조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큰 자료로 평가되었다.
진흥왕은 540년부터 576년까지 37년 동안 재위하고 낙동강 서쪽 가야군을 완전히 병합했다. 그 후 한강 하류로 이동하여 서해안 일대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함경남도 이원 일대를 북동쪽으로 가로지르는 등 외국정복사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영토에 넓은 지역.
진흥왕 순수비는 신라의 순수하고 순결한 왕 진흥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로 백성의 마음을 돌보는 동시에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전쟁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포상을 발표하고 경축하였다. 함께하는 전쟁의 신들. 지금까지 창녕비, 북한산비, 마오령비, 황초령비라고 하는 4가지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기념물들은 삼국의 관계와 당시 신라의 정치·사회적 측면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었다.
무령왕
무령왕은 백제의 25대 왕(재위 501년~523년)이다. 재위 기간에 단뤄 제도를 시행하고 지방 통치를 강화하고 백성을 농업으로 돌아가 정착하도록 독려하여 농민 계급의 안정을 이룩했습니다. 또한 고구려와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여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지금까지 운영왕은 양에게 보낸 신임장에서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하여 백제의 번영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무령왕의 탄생
무령왕의 성은 부여이고 이름은 사마 또는 융이었다. 이름 때문에 사마왕이라고도 불린다. 『일본서기』에서는 도군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왕의 무덤에서 출토된 석판에 따르면 서기 462년에 태어났습니다. 501년 동성왕이 암살되어 40세에 즉위하여 523년 사망할 때까지 23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역사적 문헌에 따르면 무령왕의 아버지에 대한 다양한 설이 있습니다. 동성왕의 차남이라는 설, 개로왕이 곤지의 친부이자 계부라는 설, 마지막으로 강지왕과 동성왕의 장남이 이복형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석판의 사망연도를 역산하여 다양한 역사적 자료를 비교함으로써 그가 강지의 장남이자 동성왕의 이복동생임을 알 수 있다. 곤지는 왜로 가는 길에 축자 각라도에서 무령왕을 낳았다.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도군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곧바로 배에 태워 백제로 보냈다고 한다.
백제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무령왕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한성의 함락에서 살아남은 것으로 보아 개로왕과 함께 궁에서 살았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곤지가 귀국한 뒤 아버지를 도우며 국내 정치에 뛰어든 모양이다. 동성왕이 암살된 후 무령왕은 문헌기록에 다시 나타났다. 동성왕을 암살한 백가는 무령왕이 즉위하자마자 반란을 일으켰고, 즉시 무령왕에게 진압되었다. 동성왕의 죽음과 즉위를 정치적으로 이끈 40세의 무령왕은 자연스럽게 국가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무령왕의 정치능력
동성왕은 새로운 신진세력을 이용해 친정체제를 구축했으나 말년에 측근정치로 변하여 암살당했다. 이 과정을 목격한 무령왕은 동성왕을 본보기 삼아 신구귀족과 세력균형을 맞추려고 했다. 후반부의 인우, 사오는 신진귀족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귀족들이 중앙정부에 들어가는 과정은 동성왕때부터 시작되었고, 무령왕시대에는 그 수가 더욱 늘어났다. 이에 따르면 무령왕은 좌평직를 재편하여 상좌평, 중좌평, 하좌평, 대좌평으로 나누었다. 결과적으로 같은 좌평으로도 그 안에 질서가 다시 세워진것이다. 무령왕은 증가하는 귀족의 힘을 통제하기 위해 새로운 왕 중심의 질서를 만들어낸것이다.
그리고 즉위 초기부터 왕족을 대외전쟁과 지방통치에 적극 활용되었다. 무령왕대에는 22명의 단로가 있어 지방정무를 관장했다. 왕실이 지방을 동원함에 따라 지방의 토착 권력은 중앙 법령에 통합되었습니다. 그 결과 무령왕의 왕위는 더욱 강화되었다.
동시에 웅진 천도의 혼돈 속에 심각한 자연재해가 발생해 서민들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동성왕과 무령왕 시대에는 가뭄과 홍수가 잦고 도둑질과 전염병이 잦아 피해가 가장 컸다.. 무령왕은 백성의 앞날을 막는 근본적인 조치로 정착을 강요하는 조치를 취했다. 제방은 자연 재해에 대응하고 유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한것, 이러한 귀농 정책으로 세금과 노동 기반이 확대되고 사회적 혼란이 점차 진정되었습니다.
이사부
이사부는 누구인가?
이사부는 6세기에 활동한 신라의 장군이다. 우산국과 가야를 정복하는 등 전장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두며 중추적인 정치인이 되어 신라 정치에서 활약했다.
이사부의 출신
이사부는 신라 17대 왕 나물왕의 4대손 출신이다. 정확한 출생 연도와 사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이름은 태종 또는 이종으로도 쓰입니다. '태'는 이끼를 뜻하므로 태종을 읽으면 '잇부'가 된다. 단양 적성비에는 이사부, 일본서기에서는 이질부례라고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
이사부의 성은 삼국사기에는 김씨 로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박씨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사부가 나물마립간의 4세손이 맞다면 그의 성을 김씨 라고 가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박제상에게도 신라의 성 기록이 엉망이 된 사건이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삼국사기'와 달리 박제상이 김제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일부 연구에서는 이 오류가 당시 신라가 이 성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설이 있다. 성은 나중에 추가되기 때문에 부계 또는 모계에 따라 성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사부의 업적
505년, 신라는 주군현제를 시행하였다. 이때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에 실직주가 세워지고 이사부가 군주가 되었다. 이 시기 군주의 성품에 대하여는 지방의 병무와 민사를 관장하는 관료라는 견해와, 해당 방면에 설치된 군부대 '정'의 지휘관이라는 견해로 나뉜다. 관련 지역. 어느 쪽이든 이사부는 신라 북동쪽 해안의 주요 기지에서 강력한 군대의 우두머리가되었습니다. 이사부의 활동 시기를 고려하면 5세기 후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그가 왕이 되었을 때 그는 매우 어렸음에 틀림없다. 그래도 왕족의 혈연적으로 이어진 인물이였기에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512년에는 지금의 강원도 강릉에 하슬라주가 세워지고 이사부가 왕이 되었다. 이 조치는 지역의 군사 센터가 실직에서 하슬라로 이전되었기 때문으로도 본다. 이사부는 하슬라 군주로 임명된 해에 우산국을 합병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산국 사람들은 매우 사나운 사람들이라 복종을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사부는 나무 사자 몇 마리를 만들어 배에 싣고 오산 해안으로 가서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들이 풀려날 것이라고 거짓 주장했습니다. 우산국 사람들은 이사부의 꾀에 넘어가 항복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의 진실을 믿는 데에는 약간의 의심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울릉도는 바람이 잔잔하여 동쪽바다 가운데에서 이틀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우산국 사람들은 바다가 깊고 자랑스러워 섬기기를 거부했다. 뭐, 위산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두려워한 것은 목사자가 아니라 이사부의 거대한 함대 그 자체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울릉도의 바다에 나타난 신라의 해군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광활한 바다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저항을 멈추고 항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 성공은 실직 군주로 동해안 지역의 군사력을 장악한 후 수년간 해군을 훈련시킨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선덕여왕
선덕여왕?
선덕여왕은 신라 27대 왕이자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다. 그녀는 여자 왕이라는 이유만으로 국내 정치세력의 저항과 주변국의 압력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김유신과 김춘주의 지지를 받아 위기를 극복하고 불교의 힘으로 사상의 권위를 세웠다.
선덕여왕 출신
선덕여왕은 역사서에 선덕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성은 김씨이고 그의 이름은 덕만 또는 만입니다. 선덕은 죽은 후에 추증한 시호이다. 그녀는 26대 진평왕의 장녀이며 어머니는 복승 갈문왕의 딸인 마야부인 김씨이다. 동생이자 천명공주로서 그녀는 태종무열왕을 낳았습니다. 서동설화에서 선화 공주는 진평왕의 셋째 딸이자 선덕 여왕의 여동생입니다. 선덕여왕의 남편에 대해 산국유사는 음갈문왕을 아내로 삼았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서는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다고 한다.
632년 진평왕이 죽고 선덕왕후가 즉위하였다.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왕위에 오른 이유는? 삼국지에서는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덕만을 왕으로 삼고 그를 성고황고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 중고기의 왕위는 반드시 왕의 아들에게 계승되는 것은 아니어서 여왕 탄생의 이유가 부족했다. 같은 질문에 대해 '삼국유사'는 '성골은 남자가 다하여 여왕을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라고 다른 이유를 전한다. 당시 진평왕의 가계를 보면 진평왕의 동생인 백반과 국반이 죽고 국반(진덕여왕)의 딸 승만만 남았다. 정평왕의 혈통에는 성골의 지위를 가진 사람이 없었으며, 차선책으로 여성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성골의 지위는 선덕여왕이 즉위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것은 왕위 계승에 반대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631년, 진평왕이 죽기 직전 이찬 칠숙과 아찬석품이 반란을 일으켜 진압되었다. 이 반란은 선덕여왕을 후계자로 내세운 것에 대한 항의로 보인다. 이에 선덕여왕은 '성고황조'라는 칭호를 통해 성골의 위상을 강조하고 신성을 과시하여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632년 선덕여왕이 즉위하여 16년부터 647년까지 신라를 다스렸다. 선덕왕후는 생전에 정확한 사인을 밝히고 낭산 남쪽 도리천 한가운데에 묻으라고 명했다. 선덕왕후가 예언한 날짜에 죽자 신하를 낭산 아래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장례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후에 문무왕은 선덕여왕의 능 아래 사천왕사를 지었다. 불교에서는 도리천이 사천왕천 위에 있다고 하여 선덕여왕의 예언이 맞다. 현재 선덕여왕릉은 경주 배반동에 있다. 선덕여왕이 죽은 후 사촌이 즉위하여 진덕여왕이 되었다.
맞서싸운 계백!
계백의 중용
계백은 660년 전투 이전의 기록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 남자이다. 계백 관련하여 "삼국사기"와 "계열백전"에는 가족과 배경에 대한 언급 없이 그가 벼슬에서 달솔 되었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삼국 사기'와 '백제본기'에서는 그의 활동이 660년 신라와의 전투에서만 드러났고, 그 이전에 그가 정치적이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단서를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자왕은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전투에서 계백을 중용 했고, 계백은 수적으로 열세일 때 신라군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등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계백이라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등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백제의 내부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재위 초기에 의자왕은 신라를 맹렬히 공격하고 대야성을 비롯한 여러 곳을 점령하고 영토를 확장하고 당의 대외관계 안정을 위한 공물을 바쳤다. 그러나 655년 이후 의자왕은 실정을 하였으며 노골적인 발언을 하던 성충은 감옥에 갇혔고, 그의 41명의 서자들은 이름이 백제 고위 관료인 좌평이었으며 정치를 파행적으로 운영하였다. 또한 성충이 죽기 전에 장차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여 기벌포와 침현을 지켜야 한다는 글을 올렸지만 의자왕은 그것을 읽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성충이 예견한 대로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가 백제를 공격했고 의자왕은 궁중 관리들과 방어 전략을 논의했다. 그러나 당나라를 먼저 제지하자는 좌평 의직과 신라군을 먼저 처치하자는 달솔상영은 반대했다. 동시에 백제는 신라군이 탄현을 통과하면서 지리적 이점을 포기했다.
계백의 이름이 거론되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의자왕은 신라의 군대를 막기 위해 5,000명의 병사를 황산으로 보냈다. 의자왕대 신라전쟁에 참전한 인물은 윤충, 의직, 은상이다. 그 중 윤충은 대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존엄을 위태롭게 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의자왕은 활동하지 않았던 계백에게 중책을 맡겼다.
이런 점에서 계백은 성충, 홍수처럼 나라를 위한 마음과 능력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는 위대한 장군이지만, 정치적 갈등 때문에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중요한 인물. 경계하고 소외되었던 인물이지만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백은 이미 늦어버렸다.
가족을 죽인 그
"삼국사기"와 "계백열전" 에는 의자왕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계백이 집으로 돌아와 온 가족을 죽이고 출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계백은 “나라의 존재를 알 수 없는 것은 당나라와 신라의 막강한 세력과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사로잡혀 노예가 될 수도, 모욕을 당하는 것보다 기꺼이 죽는 것이 낫다." 계백은 이제 적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계백이 가족을 죽인 것 관련하여 고려 말, 조선 초기 문신권근은 『삼국사절요』에서 계백이 가족을 죽였다고 말했고, 가족을 죽인 이유가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었고, 이미 스스로를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권근의 평가는 '동국통감'에서 이미 모두가 백제가 멸망할 것을 알고 있었고, 계백이 가족을 죽인 행동이 도를 벗어난 것일지는 모르나 그는 과감하게 앞으로 나아간 것이다. 패배한 후에도 절개가 눈에 띄기 때문에 권근의 생각이 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동사강목』의 안정복은 계백의 행동을 단호하게 옹호했다. 계백은 가족이 모욕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가족을 죽임으로써 군인들이 자신의 결정을 위해 싸우는 결단을 보여주는 모범이 되었다. 가족을 생각하며 제 몸 살고자 하는 마음 대신 결사항전의 각오를 병사들에게 본보기로 보여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황산벌 전장
가족을 죽이고 5,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출발한 계백은 황산 북쪽에서 50,000명의 신라 병사를 만났다. 성충과 홍수가 지적했듯이 신라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가장 좋은 곳은 신라에서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으로 가는 길에 있는 천현이었다. 그러나 신라군은 이미 참현을 통과했고, 계백은 전장에서 신라의 대군을 저지하기 위해 적은 병력을 동원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계백은 황산벌에 도착한 후 험한 곳을 선택하여 신라 군대를 위해 세 개의 진영을 설치했습니다. 수적으로 불리한 계백으로는 방어하기 위해 지형을 사용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계백은, 상영, 충상은 함께 원정을 나갔고, 세 사람이 각각 하나의 진영을 잡고 신라군과 싸웠다. 신라군을 이끈 김유신은 병사들을 3군으로 나누어 계백의 진영을 공격했지만 백제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연이은 패배를 당했다. 이때 계백은 5000명의 군대로 70만 명의 오군을 무찌른 월왕 구천의 전투를 참고하여 병사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신민회 105인 사건
일제는 왜 105인 사건을 조작·날조하였을까?
105인 사건은 1911년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암살하려다 실패에 그친 사건을 일컫는다. 그러나 사실 이 사건은 당시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 조직이었던 신민회를 뿌리 뽑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것일 뿐, 총독 암살계획은 근거가 없는 허위 날조였다. 그렇다면 왜 일제는 105인 사건을 기획·조작하였을까?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구한국군 해산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1909년 9월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여 2개월간 6만여 명에 달하는 의병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의병들은 국내에서는 더 이상 항일 투쟁을 할 공간이 없음을 깨닫고 국외로 망명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하였다. 한편, 일제는 의병세력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던 또 다른 한 축인 애국계몽운동 단체를 탄압하기 위해 1907년 8월부터 1910년까지 신문지법·사립학교령·학회령·출판법·보안법 등을 제정하여 애국계몽운동 단체의 활동을 사실상 묶어 놓았다.
1910년 8월 일제는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식민지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국내의 모든 운동단체를 발본색원하려 하였다. 그러던 중, 1910년 11월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황해도 신천에서 체포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조작하여 황해도 일대 민족운동가 16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 사건이 이른바 안악사건 이다. 또한 1911년 1월에는 양기탁 등의 보안법위반사건을 계기로 서울의 민족운동가 다수를 체포함으로써 사실상 국내 항일운동세력 제거에 힘을 쏟았다. 따라서 국내에는 안창호 등이 비밀결사 형태로 조직한 신민회만이 남게 되었다.
한편, 경무총감부 경시이자 평양경찰서 서장이었던 쿠니토모 쇼캔은 이즈음 신민회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신민회는 기독교와 평안도 지역이라는 공통점 외에도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와도 관련을 갖고 있었다. 이에 일제는 신민회 세력을 완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105인 사건을 기획·조작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일제의 종교정책에 반대하는 미국 선교사까지 축출하기 위한 속셈도 함께 깔려 있었다.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사건의 진상
체포된 지 9개월이 지난 1912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05인 사건 관련 재판이 열렸다. 당시 기소된 사람은 123명인 까닭에 이들을 모두 재판정에 세울 수 없게 되자, 일제는 재판장 확대공사까지 했다.
첫 공판일 오전은 기소자가 123명이나 되는 탓에 이들의 신상 확인과 검사의 기소장 낭독으로 마쳤다. 오후에 다시 시작된 공판은 2시 30분부터 개별 신문에 들어갔다. 그중 제일 먼저 신문을 받은 사람은 신성중학교 체육교사 신효범이었다. 그런데 이 신효범의 첫 신문은 105인 사건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재판장 : 총독 암살을 주도한 것이 신민회의 목적이며 이 단체의 회장이 윤치호인가?
신효범 : 전혀 아는 바 없다
재판장 : 그러면 왜 경찰 신문과 검사정에서 이 모든 사실을 시인했는가?
신효범 : 그것은 경찰의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
신효범은 당시 자행된 잔인한 고문 사례를 일일이 나열하면서 일제 경찰의 잔혹한 고문을 폭로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로 인해 이후 진행된 피의자 신문에서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혹한 고문을 견딜 수 없어 경찰과 검사의 신문과정에서 허위사실을 인정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관련자들은 재판정에서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음을 계속해서 항변하였으나, 이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가 없던 관계로 재판은 불리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안태국의 진술로 사건의 허구성이 낱낱이 드러났다. 즉 안태국의 기소장에는 안태국이 총독암살을 실행하기 전날인 1910년 12월 26일 평양에서 하루를 머문 뒤, 27일 새벽 정주에서 60여 명의 동지를 인솔하여 선천역으로 갔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기소장 내용은 곧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안태국은 12월 26일 밤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양기탁·이승훈·유동열 등 7인을 위로하기 위한 모임을 서울 명월관에서 주선하였고, 다음 날인 27일 서울 광화문우체국에서 평양의 윤성운에게 보낸 전보문을 보냈다고 하면서 요리대금 영수증과 전보문을 증거물로 제출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 요리대금 영수증과 전보문 등 명확한 증거물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심 재판부는 21회에 걸쳐 공판을 진행한 끝에 1912년 9월 기소된 123명 중 18인을 제외한 105인에게 유죄판결을 선고하였다. 윤치호·양기탁·임치정·이승훈·안태국·유동열 등 지도급 인사 6명에게는 징역 10년, 옥관빈 등 18명에게는 징역 8년, 이덕환 등 39인에게는 징역 6년, 오대영 등 42명에게는 징역 5년형을 선고하였다. 1심 판결에 불복한 105인은 상급 법원인 경성복심법원에 상고하였다. 4개월여에 걸쳐 52회의 공판 끝에 1913년 3월 2심 재판부는 양기탁 등 지도급 인사 6인을 제외한 99명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에 양기탁 등 지도급 인사 6인은 고등법원(현재의 대법원에 해당)에 상고한 끝에 1913년 10월 최종심에서 재판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제는 그들을 곧바로 풀어주지 않고 1915년 2월에야 ‘특별사면’ 형식으로 사면하였다. 이것으로 105인 사건은 종결되었다.
105인 사건을 무죄로 이끌어 낸 데에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협조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때까지 일제의 종교정책과 마찰을 빚던 외국인 선교사들은 이 사건 관련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을 일제의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사건으로 인식하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105인 사건의 전모를 본국 선교본부와 각국 언론, 미국정부에 알리는 한편, 대규모의 변호인단을 구성하여 재판에 적극 대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노력 덕분에 세계 언론은 이 사건을 주목하게 되었고, 일제의 음모를 전 세계에 폭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출처 -우리 역사넷 -
숭례문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에 완성하였다. 숭례문은 중앙에 홍예문이 있는 기반 위에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건물이다. 홍예문에는 철이 덧씌워진 큰 문이 양쪽으로 달려 있다. 기단 위로는 얕은 담을 두르고, 좌우 양쪽에는 작은 문과 계단이 있어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전형적인 다포형식의 건물로 평가된다. 숭례문은 세종 30년(1448)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 화재로 누각 2층 지붕이 붕괴되고 1층 지붕도 일부 소실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며, 5년 2개월에 걸친 복원공사 끝에 2013년 5월 4일 준공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한편 숭례문의 현판을 누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양녕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으나 글을 알지 못하는 척했다. 스스로 미친 척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지만 아무도 양녕의 진심을 아는 이가 없었다.“라고 전하듯이 양녕대군이 썼다고 되어 있으나 여러 이설이 존재한다. 추사 김정희의 《완당 전집》에는 조선 초기의 문신인 신장의 글씨라고 적혀 있으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의 글씨라 한다”면서도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이라고 썼다. 서울 성곽의 다른 문과 일반적인 문들의 현판들은 대부분 가로로 달려 있지만, 숭례문의 현판은 특이하게 세로로 만들어져 있다. 이는 관악산의 화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세로로 달았다고 전해진다.
원효대사 들어보셨죠?
원효는 7세기에 활동한 신라 승려였다. 여러 불경을 읽고 큰 깨달음을 얻은 후 그는 불교 사상과 종파 사이의 치열한 대결을 전심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효대사의 출생
원효의 원래 성은 설씨이고 어릴 때 이름은 서당이었는데, 출가하여 원효라는 법명을 가지게 된다. 할아버지는 잉피공, 아버지는 나마를 지낸 담날이다. 그는 617년 지금의 경북 경산시 자인면 혹은 압량면 지역에 해당하는 압량군 남쪽 불지촌 북쪽 밤골 사라수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설씨가 보통 6두품에 해당하는 귀족이었고, 그의 부친이 중앙귀족에게만 수여하는 경위 11등 관등인 나마를 소지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집안은 신라 왕경 경주와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효는 15세를 전후한 시기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는데, 특정한 스승 밑에서 경전을 배우지는 않았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불법을 공부하였다. 혜숙, 혜공, 대안, 낭지 등 당시 유명한 신라 승려들과 교류하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중생의 구제를 목표로 하던 대승불교적 성향을 보여준다. 또 고구려에서 망명해 완산주에 와 있던 보덕을 스승으로 삼았다는 전승도 있으며, 시기적으로 봐서 자장에게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타고난 총명함을 바탕으로 스스로 불경을 공부하고 수행다가, 650년 보다 높은 수준에 도달하고자, 함께 불법에 정진하던 8살 연하의 동료 의상과 함께 당 유학길에 오른다. 그러나 요동에서 고구려군에 잡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661년 에 두 사람은 다시 유학을 시도하는데, 도중에 밤이 되어 무덤 사이에서 잠을 청하게 되었다. 심한 갈증을 느껴 어둠 속에서 샘물을 손으로 떠 마셨는데, 물맛이 좋고 시원하였다. 하지만 날이 밝고 보니 그것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고, 이를 알게 된 원효는 역해서 모두 토할 것 같았다. 이때 그는 홀연히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는 ‘일체유심조’의 깨달음을 얻게 되고, 굳이 유학을 갈 필요가 없어져 의상과 헤어져 돌아온다.
그리고 스스로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중국 고승들이나 유학승들에 전혀 뒤지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능가하는 사상과 학문적 성취를 이루게 된다.
파계를 저지르고 얽매이지 않는 위대한 승려가 되다
하루 밤에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형식이나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당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로 남편을 잃고 혼자 요석궁에 있던 공주와 함께 살고 아이를 낳은 파계를 저지르게 된다. 이때 낳은 아들이 이두를 정리하고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한 설총이다. 그 후 그는 승복을 벗고 자신을 소성거사라 부르며,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행동들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불교의 깊은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널리 퍼트리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연히 광대들이 굴리는 커다란 박을 보고는, 그 모양을 본 딴 도구를 만들어 가지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춤추고 노래 불렀다. 그 노래는 『화엄경』의 “일체 얽매이지 않는 사람은 한 번에 생사를 벗어난다.”는 구절에서 따온 무애가로, 불교 교리를 쉽게 풀어 누구나 부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사람들에게 그 노래를 가르쳐 부르게 하여, 누구나 부처님을 알고 쉽게 그 가르침을 따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파계 이후 그의 기행은 대중 속에 스며들어 그들과 함께 살면서 불법을 전하려 한 교화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원효는 고고한 고승의 모습을 포기하고 불교 대중화를 통해, 지배층 중심 불교에서 대중 불교로의 확산을 이룩한 위대한 종교가였던 것이다.
의자왕? 삼천궁녀?
의자왕은 백제의 제31대 왕이자 마지막 왕으로 재위 기간은 641년~660년이다. 집권 후 15년까지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정국을 이끌었다.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당과 거리를 두면서,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집권 15년을 지나면서 여색과 향락에 빠져 충신을 멀리하고, 대외관계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면서 망국의 왕으로 기억되었다.
의자왕의 즉위과정
의자왕의 성은 부여, 이름은 의자이다. 제30대 무왕의 장자로 태어났다. 어머니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서동설화와 미륵사 사리봉안기의 기록을 통해 선화공주 혹은 사택적덕의 딸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다. 왕비에 대한 기록 역시 전하지 않는다. 다만 657년에 왕의 서자 41명에게 좌평을 제수하고 식읍을 내렸다고 하므로,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자식으로는 태자로 책봉되었던 융과 효, 그리고 태·연·풍·궁·충승·충지 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641년 무왕이 죽자 왕위에 올라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20년간 백제를 통치했다.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시호는 없다.
선왕인 무왕은 재위 기간 내내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무왕은 집권 후반기인 632년에 맏아들인 의자를 태자에 책봉했다. 왕위계승에 대한 귀족들의 간섭을 배제하고 후계구도를 명확히 한 것이다. 이로써 의자왕은 정치적으로 좀 더 안정된 기반 위에서 즉위할 수 있게 되었다.
의자왕이 태자에 책봉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무왕의 장자라는 정통성에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 자신의 능력과 자질도 무시할 수 없다. 즉위 이전 의자왕은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해동증자라고 일컬을 정도였다. 증자는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도 효로 유명한 사람이다. 의자가 효와 우애를 중시했다는 것은 왕위계승 과정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반발을 막고 왕족들 간의 유대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와 같은 노력 덕분에 의자는 왕족과 귀족들, 나아가 백성들로부터도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무왕이 사망하자, 의자는 순조롭게 왕위를 계승했고, 즉위 초부터 안정적으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의자왕대 전기의 정치 상황
의자왕대의 정치는 크게 둘로 구분한다. 먼저 전기는 즉위부터 655년까지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면서 효과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 의자왕의 왕권은 무왕대보다 더 강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정통성을 갖춘 왕위계승 덕분에 의자왕은 무왕의 정치적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하지만 의자왕으로서는 자신만의 세력기반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642년 1월에 대규모 숙청작업을 단행하였다. 숙청의 계기가 된 것은 국주모즉, 의자왕의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 직후 의자왕은 배다른 동생의 아들인 교기와 교기의 이모 4명, 내좌평 기미, 명망 있는 사람 40여명을 섬으로 추방했다. 배다른 형제와 그 가족, 그리고 배후세력을 한 번에 제거함으로써 왕권강화의 전기로 삼은 것이다.
이후 의자왕은 본격적으로 왕권강화 작업을 추진한다. 같은 해 2월에 지방의 주·군을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사면조치를 취했다. 7월에는 신라의 미후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8월에는 장군 윤충을 보내 신라의 대야성(경상남도 합천)을 함락시켜 김춘추의 딸과 사위였던 성주 김품석을 죽이고 신라의 수도를 턱밑에서 위협하게 되었다. 이처럼 대내외적으로 권력 기반을 강화한 의자왕은 644년에 부여융을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일찌감치 후계구도를 확립시켰다. 교기로 대표되는 방계 왕족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직계를 정치의 전면에 내세우게 된 것이다.
의자왕대는 대외관계에서도 전환점을 맞는다. 642년 겨울, 신라는 대야성 전투의 패배를 갚기 위해 고구려에 군사를 요청한다. 그러나 당시 집권자였던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며 신라의 청병을 거부한다. 그러자 의자왕은 643년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하려다 선덕여왕이 당에 구원을 요청한 사실을 알고 그만두기에 이른다. 이로써 한성 함락 이후 이어졌던 고구려와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여제동맹을 형성하게 된다.
의자왕은 즉위 초 매년 당에 사신을 보냈고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이에 협조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당이 고구려 정벌에 나서자, 오히려 당을 원조하던 신라를 공격해 7개성을 빼앗아버렸다. 이후로는 당에 사신 파견을 중단하고 독자적인 외교를 추진하며 고구려와 더욱 가까워졌다. 이에 위기를 느낀 신라는 648년 김춘추를 당에 보내 백제 공격을 요청했고, 당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로써 당의 공격 목표는 고구려에서 백제로 바뀌었다. 백제는 651년과 652년에 일시적으로 대당 외교를 재개하여 당과 신라의 차단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이후로는 당과의 외교를 완전히 단절하였다. 이로써 국제관계는 점차 ‘백제·고구려 대 신라·당’의 대결구도가 명확해져 갔다.
출처 - 우리역사넷 -
발해 건국!
건국 과정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은 고구려의 민들을 강제로 당으로 이주시켰다. 당은 고구려의 유력한 지배층들을 당 내지의 빈 땅으로 옮겨 그들의 인적, 물적 기반을 철저히 파괴하였다. 발해의 건국 주역들이 당의 영주 지금의 요령성 조양 지역에서 처음 일어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였다. 696년 5월, 영주에서는 거란족 추장 이진충이 당의 지배에 저항하며 영주도독 조문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진충은 스스로를 가한이라 불렀다. 당은 즉시 조인사, 장현우, 이다조, 마인절 등 28명의 장군을 보내 토벌하게 하였다. 당은 이진충의 이름을 이진멸로, 손만영의 이름은 손만참으로 바꾸는 등 적개심을 드러냈으나 9월이 되도록 성과는 없었고 오히려 이들에게 계속 패배하며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었다. 영주 지역은 당의 통제가 불가능한 혼란한 상황이 되었고 이 틈을 타 이곳에 강제로 옮겨졌던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거란족, 해족, 말갈족 등은 탈출을 시도하였다. 대조영의 아버지인 걸걸중상이 이끄는 집단과 걸사비우가 이끄는 집단은 이때 영주를 빠져나와 함께 동쪽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당이 거란의 공격을 막는데 집중하면서 걸걸중상 집단과 걸사비우 집단은 초반에는 비교적 안전하게 동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당도 거란을 막는데 집중하였으므로 이들의 동향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 같다. 이들이 요해처를 마련하여 성벽을 쌓고 방어 체계를 공고하게 만들어 나가자 당은 걸걸중상에게 진국공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에 봉하며 회유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는 다시 당의 지배 아래 들어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당은 우록금위대장군 이해고를 보내어 이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해고와의 교전 중에 걸사비우가 죽자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무리를 통솔하여 천문령( 송화강의 지류인 휘발하와 혼하가 나뉘는 지점으로 합달령으로 추정됨)을 넘었다. 이 천문령 부근에서 대조영의 군사와 이해고가 이끄는 당군이 일전을 치뤘다. 이 전투에서 이해고만 탈출하여 돌아왔다고 기록할 정도로 당군은 크게 패배하였다. 돌궐은 요동 지역에 대한 당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하고 거란과 해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대조영도 이러한 가운데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더 이동하여 계루부(여기서는 고구려를 의미)의 옛 땅을 차지하고 동모산에 도읍을 정하였다.
동모산은 지금의 길림성 돈화시에 위치한 성산자산성으로,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동모산이 영주로부터 2,000리 떨어진 곳이라고 되어 있다. 대조영 세력은 영주로부터 2,000리나 되는 긴 여정을 당군과 싸우면서 이동하였고 동모산에 이르러 698년 진국을 건국한 것이다. 그런데 698년 대조영이 세운 국가의 국호가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에서는 대조영이 진국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고 『책부원구』 에서도 대조영이 세운 국가를 진국으로 기록하였다. 한편 최치원도 발해의 국호를 진국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당서』에서는 진국왕으로 기록하였다. 또한 『삼국유사』가 인용한 『통전』에서는 진단이라고 하였다.
이 중에서 진국은 무측천이 걸걸중상을 진국공에 봉하였다는 기사에서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이 당에서 일어난 발해와 신라의 쟁장사건에서 당이 신라의 손을 들어준 것을 감사한 표문에서 발해를 진국이라고 칭하고 있으므로 발해가 존속한 동시기의 신라의 기록에 적힌 진국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진국에서 발해로 국호를 바꾸는 것은 713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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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건국자 왕건
한반도를 재통일한 고려의 건국자
고려를 세워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877년에 태어나 943년에 사망하였다. 지금의 개성인 송악의 호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부하로 있다가 그를 제거하고 왕위를 차지하여 918년에 고려를 세웠다. 이후 후삼국 시대의 전란 속에서 신라의 항복을 받고, 이어 견훤이 세운 후백제를 무력으로 꺾어 936년에 통일을 달성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용건이며 어머니는 위숙왕후로 추봉된 한씨였다. 29명의 부인을 두었고, 그 사이에서 26명의 왕자와 9명의 공주를 자녀로 얻었다. 능은 현릉이며, 시호는 신성이다.
송악 출신의 젊은 호족, 궁예의 휘하로 들어가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꺾고 한반도의 통일을 이룬 것은 668년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시작된 통일신라는 8세기 중반을 지나며 점차 혼란에 빠져들었다. 중앙의 귀족들이 왕위와 권력을 둘러싸고 극심한 권력 투쟁에 돌입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이에 전국적으로 조세 납부를 거부하는 현상이 발생하였으며, 지역별로 유력자들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경주의 신라 조정에서 이탈하는 경향이 급속도로 심해졌다. 이러한 유력자들을 호족 혹은 성주·장군이라 통칭한다. 한반도 전역에서 수많은 호족들이 등장했고, 그 중 가장 두각을 드러낸 것은 훗날 후고구려를 세우는 궁예와 후백제를 세우는 견훤이었다. 이들은 각각 현재의 철원과 전주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주변의 호족들을 포섭 혹은 제압하며 세력을 키웠다.
궁예가 강원도 일대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리자, 그 주변의 호족들은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했다. 896년(진성여왕 10), 송악은 궁예에게 귀부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용건, 즉 왕융은 “대왕께서 만약 조선·숙신·변한 땅의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저의 장자를 성주로 삼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고 하였다. 이에 왕건은 20세의 나이에 발어참성을 쌓고 그 성주에 임명되며 궁예의 조정에 들어섰다. 그리고 이들의 근거지인 송악은 궁예 세력의 도읍이 되었다. 이후 궁예의 세력은 날로 확장되어, 점차 지금의 황해도와 경기도 지역까지 그 판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왕건, 궁예 군을 이끌고 전장을 누비다
궁예는 자신의 휘하로 들어온 젊은 왕건을 중용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900년에 궁예는 왕건에게 군의 지휘를 맡겨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 북부 지역을 공략하도록 하였고, 왕건은 그 기대에 부응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광주·충주·청주·당성·괴양 등의 군현을 성공적으로 공략한 왕건에게 궁예는 아찬을 제수하여 포상하였다. 궁예는 왕건에게 계속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903년에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바다를 통해 후백제의 후방 깊숙이 위치한 금성군을 공략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지금의 나주 지역이다. 이는 전략적으로 상당히 파격적이면서 위험도가 높은 임무였다. 왕건은 금성군과 그 주변 10여 군현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이를 통해 궁예는 견훤의 영역 배후에 군사적 거점을 마련하는 한편, 후백제가 중국 대륙과 왕래하는 것을 견제할 수 있었다. 또 왕건은 이곳의 호족인 다련군의 딸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그녀가 바로 훗날 2대 국왕으로 즉위하는 왕무를 낳는 장화왕후 오씨이니, 왕건에게도 이 임무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고 하겠다. 그가 무려 29명의 부인을 두게 되는 것은 이렇듯 유력한 호족이나 부하들과 혼인을 통해 결속을 다졌던 결과였다.
이 뒤로도 왕건은 승승장구하였다. 최전방에서 후백제군과 치열한 전투를 거듭하였고, 그러한 노력과 성공의 대가로 913년(수덕만세 3)에는 파진찬에 올라 시중이 되었다. 이 시점까지 궁예와 왕건의 만남은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궁예는 왕건을 등용하여 자기 세력의 판도를 크게 넓힐 수 있었고, 왕건은 궁예의 조정에서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고려사절요』에는 당시 궁예가 기뻐하여 좌우의 신하들을 보고 말하기를,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견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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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건국자 왕건 2편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하다
그러나 권력과 정치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고려사절요』에서는 “태조가 궁예의 교만함과 포학함을 보고는 다시 뜻을 변방에 두었다.”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세운 공에 비해 포상이 적다고 불평하는 부하들에게 “삼가하고 태만하지 말라. 오로지 힘을 합하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주상께서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고,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뜻을 얻어 조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전하지 못하니, 조정 밖에서 정벌에 종사하면서 힘을 다하여 왕을 보필하는 것만큼 나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당시 궁예는 점차 포악한 정치를 펼쳐 신하들의 불만과 두려움을 샀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기록이 고려 건국 이후 왕건의 입장에서 작성된 것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당시 왕건에게 독자적인 지지 세력이 생겼다는 사실이고, 결국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을 필두로 하는 이 세력은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새 왕으로 추대하였다. 혹은 왕건이 이들을 이끌고 왕위에 올랐다고 해야 적절할까? 새 나라의 국호는 고려, 연호는 천수. 918년 6월의 일이었다.
왕건과 견훤,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겨루다
이제 한반도의 판도는 왕건의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가 자웅을 겨루는 형세로 바뀌었다. 8월에 후백제에서 고려에 보낸 즉위 축하 사신이 돌아간 지 채 두 주도 지나지 않아, 웅주·운주 등 10여 지역이 고려를 버리고 후백제로 붙었다. 긴장의 시작이었다. 920년 10월에 고려와 후백제는 신라를 사이에 두고 갈등을 빚었다.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고려에 구원을 요청했고, 고려가 이에 응하자 후백제가 고려를 적대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두 나라는 일시적으로 화친을 맺기도 하나, 강한 군사적인 충돌을 이어갔다.
공방을 거듭하던 927년 10월, 고려는 후백제에게 뼈아픈 대패를 당했다. 당시 견훤이 직접 군을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더니, 급기야 수도 서라벌을 함락시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견훤은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서라벌을 노략질하는 한편, 새로 경순왕을 세웠다. 신라는 이미 무력으로 고려나 후백제와 견줄 수 없는 최약체로 전락하여 있었다. 고려가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다져 나가자, 후백제가 이를 무력으로 저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 왕건은 직접 5천의 기병을 이끌고 견훤을 향해 진격했다. 고려군은 지금의 대구 인근인 공산의 동수에서 후백제군과 격돌하였으나, 대패하고 왕건이 아끼던 김락과 신숭겸 두 장수마저 전사하고 말았다. 왕건은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견훤은 그 기세를 몰아 고려를 몰아쳤고, 이후 929년까지 고려는 수세에 몰려 있었다. 이 무렵 견훤이 보낸 국서에서 “내가 바라는 바는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걸어 놓고 대동강의 물가에서 말을 물 먹이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읽던 때, 왕건은 아마도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최후의 승자 왕건, 한반도를 통일하다
이후의 기록을 읽다 보면, 갑자기 반전이 벌어진다. 929년 12월, 왕건은 견훤에게 포위된 고창군, 즉 지금의 안동 지역을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몸소 출정하였다. 유금필의 분전으로 포위를 뚫고 고창으로 들어간 고려군은 이듬해 1월, 8천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고 견훤을 도주하게 하였다.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현지의 호족들인 김선평·권행·장길의 협력 덕분이었다. 이후 영안 등 30여 군현이 투항하고, 다음 달에는 강원도와 경상도 일대의 110여 성이 고려로 붙었다. 고려 쪽으로 운명의 흐름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우연이었을까?
우연이라기보다는, 왕건이 즉위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했던 호족들에 대한 회유와 유화책이 효력을 발휘한 것이라고 평가된다. 특히 옛 신라의 영역에 속했던 지역의 호족들로서는 아무리 독자 세력으로 살고 있다고 해도 신라의 수도를 짓밟은 견훤에게 우호적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후 견훤은 몇 차례 반전을 노리며 공격했으나, 마침 벌어진 권력 승계 갈등으로 인해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견훤이 고려로 투항하고, 936년에 반역자인 아들을 벌해달라며 후백제 정벌의 도화선을 지핀 것은 아마 우리 역사에서 손꼽히는 희극 혹은 비극의 한 장면이 아닐까.
936년 6월, 왕건은 아들 왕무에게 선봉을 맡겨 후백제 공격군을 출병시켰다. 그리고 9월, 직접 본진을 통솔하여 진군한 왕건은 일리천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그대로 도읍 완산주까지 점령하였다. 이미 신라는 935년에 고려에 항복한 상태였다. 이렇게 하여 40년 가까이 계속되었던 후삼국의 쟁패는 끝이 나고, 고려가 통일을 이루어 한반도의 유일한 패자로 올라섰다.
출처 - 우리역사넷 -
담판하면 나지 서희
서희는 고려 3대 국왕인 광종대부터 5대 국왕인 성종대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던 정치가로, 거란과의 1차 전쟁에서 외교적 협상으로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한반도 서북부 일대에 이른바 강동6주라 불리는 거점을 세워 이후의 외침에 대비하는 데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가계와 출사
서희는 광종대의 명신 서필의 아들이다. 자는 염윤이었다. 『고려사』에서 서필이 이천 사람이라 하였으므로, 그의 집안은 지금의 경기도 이천 지역 출신으로 보인다. 서희의 조부인 신일이 현재 이천 서씨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서희가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간 것은 광종대의 일이었다. 18세였던 960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관직자의 길에 들어선 서희는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광평원외랑과 내의시랑을 거쳤다.
972년 8월에는 송나라에 파견되는 사신단의 정사로 임명되었다. 이때의 사신단 파견은 10여 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이 사신단의 대표인 정사가 된 것은 당시 서희가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당시 서희의 행동이 법도에 잘 맞아, 송나라 태조가 이를 높이 여겨 검교병부상서부사·내봉경으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광종대에 활발한 활동을 하였던 서희였지만, 다음 국왕인 경종 시대에 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고려 초의 자료가 여러 차례의 전쟁을 거치며 대부분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 성종대의 기록에서 서희는 다시 중요한 역할로 등장한다. 983년에 서희는 좌승을 거쳐 병관어사로 승진했다. 이는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비교할 수 있는 요직이었다.
이 시기의 기록에 서희의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국왕 성종이 서경에 행차하여 영명사라는 사찰 일대에 가서 즐기려 하자 간언을 올려 중지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성종은 이에 그 계획을 중단하고, 서희에게 바른 건의를 한 상으로 안장과 말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후 서희는 승진하여 내사시랑에 올랐다.
출처 - 우리역사넷 -
담판하면 나지 서희 2편
1차 고려-거란 전쟁 때의 활약
이 무렵, 동북아시아는 새로운 국가들의 탄생과 충돌로 동요하고 있었다. 대륙 북방의 초원에서는 유목민족이었던 거란족이 야율아보기라는 걸출한 수장의 지휘 아래에 10세기 초에 국가를 건설하고, 발해를 멸망시키는 등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대륙에서는 10세기 후반이 되면서 5대10국의 혼란을 정리하고 송나라가 통일을 달성하였다.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후삼국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통일 국가로서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와 거란, 송 사이의 긴장과 갈등도 점차 높아졌다.
이들 나라 사이의 본격적인 무력 충돌은 송이 거란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송은 대륙 전체를 통일하는 데에 막 성공한 시점이었고, 거란은 황제의 죽음과 어린 새 황제의 즉위, 그리고 황태후의 섭정이라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에 송의 태종은 전격적으로 거란을 공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당시 섭정을 하고 있던 거란 승천황태후의 빠른 사태 수습으로 실패하고, 송의 큰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이 뒤로 송은 거란에 대해 줄곧 수비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비록 송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거란의 입장에서 이는 큰 불안요소였다. 더구나 당시 송은 이 전쟁에 동방의 고려를 끌어들여 남쪽과 동쪽으로부터 협공을 하려 시도하였다. 비록 고려가 참전하지 않아 이 시도는 무산되었으나, 거란으로서는 남쪽의 송과 동쪽의 고려가 손을 잡는 것에 대해 견제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거란은 압록강 일대의 여진족을 공략하여 제압하면서 점차 한반도를 향해 세력을 확장했다. 압록강 유역에 발해의 후예들이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정안국이 거란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도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당시 고려는 아직 압록강 하류 일대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압록강 하류는 대륙과 한반도 사이의 주요한 교통 길목이었다. 고려는 이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려 했으나 현지 여진족의 반발로 실패한 상태였다. 그런데 거란이 이 지역에 군사적 기지를 세워 선점하자, 고려는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993년 겨울에 거란의 소항덕이 이끄는 군대가 공격을 시작하여 1차 고려-거란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고려사』 등에서 이 장수를 소손녕이라 했으나, 손녕은 그의 자이므로 소항덕이라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거란군이 침입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이 해 여름에 이미 현지의 여진족이 고려에 알렸으나, 고려 조정은 이를 거짓으로 간주하였다. 당시 여진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정치적 태도가 복잡했는데, 고려-거란 전쟁에서도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편에 참전하였다. 고려 조정은 이런 상황에서 오판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여진이 다시 거란의 침입을 알려오자 비로소 상황이 급한 것을 인식하고 군사를 소집하여 전쟁 준비에 돌입하였다. 지휘관으로는 박양유를 상군사로,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로, 문하시랑 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거란군을 방어하게 하였다.
그리고 국왕 성종이 직접 서경까지 올라가 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초반에 봉산군을 잃고 선봉인 윤서안이 사로잡히는 패배를 겪었다. 안북대도호부까지 올라가려 했던 성종은 이에 서경에 머무르게 되었다.
봉산군의 함락 소식에 서희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구원에 나서려 하였다. 그러나 이 때 소항덕이 내건 침입의 구호를 보고, 서희는 강화 협상의 여지가 있음을 간파하였다. 당시 소항덕은 “우리 거란이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너희가 우리의 경계를 침략하니 우리가 토벌하러 온 것이다.”라는 주장과 “우리가 이미 천하를 통일하였으니, 아직 항복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소탕할 것이다. 즉시 항복하라.”라는 요구를 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서희의 견해를 따라 거란군에 사신을 파견해 침입의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소항덕은 이번에는 “너희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않으므로 우리가 하늘을 대신하여 벌을 내리는 것이다. 어서 항복해라.”라는 이유를 내세웠다.
거란의 마지막 구호는 상투적인 것으로 볼 수 있고, 중요한 것은 앞서 제기된 두 가지 사항이다. 즉 고구려의 옛 영토에 대한 소유권의 문제와 거란과의 외교 관계, 즉 사대 관계 체결이 관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란의 요구 조건을 들은 고려 조정에서는 대책 수립을 위한 여러 가지 논의가 벌어졌다. 국왕이 수도 개경으로 돌아간 뒤 지위가 높은 신하를 보내 항복하자는 견해도 있었고, 서경 북쪽의 땅을 떼어주고 황주부터 자비령까지를 국경으로 하자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국왕 성종은 뒤의 주장을 채택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서경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고, 그래도 남은 것은 적의 군량미가 되지 않도록 대동강에 던져버리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은 바로 서희였다. 서희는 넉넉한 식량은 전쟁의 승기를 잡는 데에 기본이 되는 것이자 백성의 생명줄이니 버려서는 안된다고 성종을 납득시켜 위의 사태를 중단시키고, 거란과 다시 싸워볼 것을 주장했다. 그는 성종에게 거란이 고구려의 옛 땅을 요구하는 것은 공갈이며, 만약 정말 그들의 주장대로 하자면 삼각산 북쪽이 모두 옛 고구려 땅인데 다 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우선 다시 싸워보고 난 뒤에 영토를 떼어주는 문제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려 조정에서 논의가 벌어지고 있을 때, 거란군은 공격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안융진의 고려군이 거란군을 방어하는 데에 성공하자, 거란군은 다시 협상을 제안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서희가 자청하여 교섭의 임무를 맡아 거란군 진지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바로 유명한 서희의 회담이 벌어진다.
서희의 강단 있는 품성을 보여주는 일화가 이 회담 기록에 전해진다. 서희를 맞이한 소항덕은 의전 절차에서부터 고려측의 기세를 꺾으려 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대국에서 왔으니 서희에게 아랫사람의 예를 따르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서희는 양국의 대신이라는 동등한 자격이니 그럴 수 없다고 맞받아치며 끝내 소항덕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결국 소항덕은 이러한 서희의 기세를 꺾지 못하고 동등한 예를 갖추며 회담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회담 첫머리에서 소항덕은 고구려 영토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고구려 땅은 자신들이 차지했고 고려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난 나라인데, 최근 고려가 이를 침략해 차지했다고 하였다. 이어 고려가 거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송과 사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문제 삼았다. 그러니 땅을 떼어 바치고 거란에 사대해야 무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이에 대하여 서희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우선 고려는 나라의 이름부터가 고구려의 후예임을 말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옛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고려가 도읍을 정했다고 하였다. 물론 당시 고려의 수도는 개경이었으나, 평양 지역도 ‘서경’ 즉 ‘서쪽 도읍’이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이어 이렇듯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니, 영토 문제를 따지자면 거란의 동경도 고려의 땅이어야 함을 상기시켰다. 거란의 동경은 지금의 요양 지역으로 옛 고구려의 영토에 포함되었던 땅이므로 이렇게 반박한 것이다. 한편 거란과 외교 관계를 체결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서희는 여진족을 이유로 내세웠다. 고려에서 거란에 가려면 압록강을 건너서 가야 하는데, 그 사이에 여진족들이 살면서 길을 막고 다니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서희는 압록강 안팎이 원래 고려의 영역이라는 중요한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고려가 이 지역에서 여진을 몰아낸 뒤 성을 쌓고 도로를 짓게 해준다면 거란에 사신을 보내 조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소항덕은 위와 같은 회담의 내용을 거란 조정에 보고하였고, 거란에서는 이를 대체로 수용하고 전쟁을 중단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렇게 하여 1차 고려-거란 전쟁은 종결이 되었다.
서희가 거란과의 종전 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자, 국왕 성종은 크게 기뻐하며 직접 밖으로 나아가 서희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종전 후의 처리는 서희의 의도대로 온전히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고려사』 서희 열전에서는 이 때 성종이 즉시 박양유를 사신으로 보내 거란 황제를 알현하여 국교를 체결하려 하자, 서희가 이를 만류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즉 소항덕과의 약속은 여진족 문제를 해결하고 압록강 안팎을 고려의 영역으로 확보한 뒤에 국교를 맺자는 것이었는데, 아직 압록강 안쪽밖에 획득하지 못했으니 미루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이듬해인 994년 봄에 거란에서 보낸 문서에 양국이 압록강을 경계로 하여 서쪽은 거란에서, 동쪽은 고려에서 나누어 성을 쌓고 길을 만들자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과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서희가 소항덕과의 회담에서 제기한 요구 사항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종은 다시 양국 간에 불화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거란의 요청대로 확정을 지었다.
압록강 서쪽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으나, 아직 고려가 지배력을 단단히 다지지 못했던 압록강 동쪽 영역에 대해 고려의 영유권을 인정받은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서희는 이 지역에 대한 요새화 작업을 진두지휘하였다. 994년에는 장흥진, 귀화진, 곽주, 정주, 귀주 지역에 성을 쌓았고, 995년에는 안의진과 흥화진에, 996년에는 선주와 맹주에 성을 쌓았다.
이 지역이 바로 이른바 ‘강동6주’로서, 이후 고려의 중요한 북방 방어 지역이 되었다. 거란과의 갈등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이 지역의 귀속 여부로 양국 간의 주요 분쟁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전쟁 상황에서도 주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기능하여, 고려가 거란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출처 - 우리역사넷 -
여진족 담당 일진
여진 정벌의 선봉에 서다
1104년에 여진족과 전투를 벌였다가 패하고 돌아온 윤관의 건의에 따라 여진족에 대항하기 위해 설치된 군사조직이다. 보병인 신보군과 기병인 신기군 그리고 승려로 구성된 항마군으로 구성되었다.
여진의 도발과 고려의 패배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한반도 북부와 만주․연해주 일대에 흩어져 살던 여진 부족들과 접촉하였다. 시기에 따라, 또 부족에 따라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될 때도 있었고, 때로는 무력 충돌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고려 숙종과 예종 대에 들어서서 여진의 한 부족인 완안부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두 세력 간에 크게 2차례의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고려가 완안부의 성장을 인식하게 된 것은 완안부에 거주하던 고려인 의원이 태사 영가의 친척을 치료해주고 돌아와 흑수에 사는 여진 부족이 날로 번성하고 군사가 강하다고 숙종에게 보고한 이후부터였다. 고려는 이때부터 완안부에 사신을 보내며 왕래를 시작하였다. 완안부의 세력 확장이 고려의 입장에서는 그리 달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완안부가 세력을 키워 주변의 여진 부족들을 장악한다면, 이는 고려가 주변 여진 부족들에게 미치고 있던 영향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숙종이 1101년 8월에 자신이 왕위에 오른 뒤에 북으로는 거란, 남으로는 송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과 함께 동쪽의 여진이 고집이 세어 순종하지 않고 있다 는 언급을 한 사실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된다. 두 세력 간에 긴장이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1104년, 드디어 사단이 벌어졌다. 동여진의 추장 오아속이 자신과 갈등을 빚은 별부의 부내로를 그 해 1월에 공형 지조를 시켜 공격하는 과정에서 기병을 고려의 정주 관문밖에 주둔시켰던 것이다. 본격적인 두 세력의 충돌은 다음 달인 2월에 시작되었다. 고려의 판동북면병마사 임간이 정주성 밖에서 여진과 충돌을 일으켰는데, 영가가 보낸 지훈 등에게 고려군은 패배를 당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승세를 탄 완안부는 고려의 정주 선덕관까지 침입하여 살해와 약탈을 감행하였다. 고려는 3월에 이번에는 윤관을 동북면행영병마도통으로 삼아 전장으로 보냈다. 윤관이 이끄는 고려군은 완안부와 전투를 벌여 30여 명의 적을 베기는 하였지만, 고려의 병사 또한 반이 넘는 손실을 당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완안부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고려는 생각지도 못한 여진의 반격에 겸손한 말로 여진을 달래고 강화를 맺고 돌아와야만 했다.
같은 해 6월에 완안부는 공형 지조 등 68인을 관문에 보내 와서 화친을 청하였다. 고려는 이렇게 두 번에 걸쳐 공세를 폈으나, 완안부를 제압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고려의 권위 실추를 가져와 동북부 여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의 감소로 이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숙종의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여진정벌을 주장한 숙종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다. 여진정벌의 실패에 대해 숙종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천지신명에게 여진 정벌에 도움을 주면 그 지역에 사찰을 창건하겠다는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숙종은 여진정벌을 다시 추진하면서, 신보군·항마군·신기군 등으로 구성된 별무반을 창설하였다. 1104년 12월의 일이었다. 문관과 무관 가운데 현재 직책이 없는 관리인 산관과 하급 관리인 이서로부터 상인과 노복 및 주․부․군․현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포함되었는데, 말을 가진 자는 기병인 신기군에 속했고, 말이 없는 자는 보병인 신보군·도탕·경궁·정노·발화 등의 군에 편입시켰으며, 나이 20세 이상 중에 과거응시자가 아니면 모두 신보에 속하게 하고 문무양반은 물론 모든 진, 부의 군인들을 사시사철 훈련 시켰다. 그리고 항마군은 승려에서 뽑아 구성하였다. 도탕·경궁·정노·발화는 신기와 신보에 속하지 않는 별도의 임무를 띤 부대로 생각되지만, 그 임무가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명칭을 통해서 그 임무를 짐작해볼 수 있는데, ‘도탕’은 ‘적이 싸울 준비를 하기도 전에 공격하여 쳐부순다’는 의미이므로 기습을 전문적으로 하는 부대였을 것이며, ‘경궁’은 강한 궁을 쏘는 부대, ‘정노’는 기계식 화살을 사용하는 부대, ‘발화’는 불을 다루는 화공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숙종은 노비부터 승려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해서 군사를 선발하여 별무반을 편성하였다. 그가 얼마나 여진 정벌을 중시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고려는 별무반 가운데서도 신기군을 그 주력으로 삼았는데, 기병으로 구성된 여진인을 상대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하지만 숙종은 여진 정벌을 실행하지 못한 채, 재위 10년인 1105년 10월에 사망하였다.
별무반, 여진정벌에 참여하다
예종대에 들어서도 별무반에 대한 지원과 관리는 지속되었다. 1106년 오연총은 당시 징발한 신기군 가운데 부모의 나이가 70살 이상이며 외아들인 사람은 면제해 주고, 한 집안에 3ㆍ4명이 종군하는 경우에는 1명을 감면해 줄 것이며, 재신과 추신의 아들 중에는 자원하여 종군한 자가 아니면 면제하도록 요청하였는데, 예종은 이를 허락했다. 그런데 재신이나 추신의 아들 가운데 스스로 종군한 자가 아닌 이를 면제해주었다는 사실은 별무반의 구성이 주로 일반 백성들로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예종은 1106년 1월에 신봉문에 나가 신기군을 사열하였으며, 11월에는 윤관과 오연총 등이 숭인문 밖에서 신기군과 신보군을 점검하였다. 다음 해인 1107년 윤10월에는 여진을 공격하기 위해 순천관 남문에서 병사들을 점검한 다음 은과 포를 주고 음식을 먹였다고 하는데, 이때의 점검은 별무반을 점검한 것으로 여겨진다.
예종 대에 들어서서 여진 정벌은 다시 본격화되었다. 그 시작은 1107년에 여진인들이 변방의 성에 출현하여 각 부락을 돌아다니며 어떤 일을 모의한다는 보고가 있은 이후부터였다. 예종은 숙종의 발원문을 내보이거나, 태묘에 점을 치는 행위를 하며 여진정벌을 하기 위한 사전작업을 하였다. 고려는 이해 윤10월에 윤관을 원수, 오연총을 부원수로 임명하고, 같은 해 12월부터 여진정벌을 단행하였다. 고려는 12월 14일 이후에 여진정벌을 단행했는데, 당시 고려가 차지한 영역은 동쪽으로는 화곶령, 북쪽으로는 궁한이령, 서쪽으로는 몽라골령까지였다.
고려가 여진 정벌에 동원한 병사의 수는 약 17만 명이었다. 이 때 참여한 별무반의 인원도 상당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별무반이 참여한 사례로는 신기군으로 참여한 민영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민영묘지명」을 보면, 그는 아버지 민효후가 동계병마판관이 되어 여진인들과 싸우다 사망하자, 이를 한으로 여기고 예종에게 간청하여 신기군이 되었다. 그는 출전하는 여진과의 전쟁 때마다 매번 선봉에 나서 말을 타고 돌격하여 적을 사로잡고 물리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진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1108년 1월에는 윤관과 오연총이 거느린 군사가 가한촌 병항에서 여진에게 포위되어 고려병사들이 다 흩어지고 10여 명 만이 남아 척준경의 구원으로 윤관이 간신히 살아남았으며, 같은 해 5월에는 여진이 27일간이나 웅주성이 공격을 받았다. 또한 같은 해 8월에 신기군 박회절 등이 여진과 길주에서 싸우다 전사하기도 하였다. 해가 바뀐 1109년 1월에도 동계행영병마록사 왕사근과 하경택 등이 함주에서 전사하였다.
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도 예종의 별무반에 대한 깊은 관심은 유지되었다. 예종은 재위 4년인 1109년 1월과 2월에는 신기군을, 3월에는 정노반군을 점검하였다. 주력부대인 별무반을 격려하며 사기를 북돋웠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결국 고려가 1109년 7월 3일 여진의 사신 사현 등에게 9성을 돌려 줄 것을 약속하면서 마무리가 되었다.
출처 -우리 역사넷 -
고려시대속 척준경의 모습
칼 한 자루로 헤쳐 간 인생
척준경은 12세기의 고려 숙종~인종시대에 살았던 무장이다. 태어난 해는 미상이며 1144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여진 정벌과 이자겸의 난 등 여러 파란이 일었던 시대의 한 가운데에 칼 한 자루를 쥐고 서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격동의 시대, 전쟁 영웅으로 우뚝 서다
척준경은 곡주 사람이었다. 지금의 황해도 곡산 일대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그의 선대는 곡주의 향리였다고 한다. 그 집안이 향리의 여러 위계 중 어디에 해당되었는지는 기록에 없으나, 척준경이 어렸을 때에는 집안이 가난하여 공부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 높은 위계의 향리 집안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네의 무뢰배들과 어울리던 척준경은 서리로 들어가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훗날 숙종으로 즉위하는 계림공의 종자로 들어갔다가 추밀원별가로 일을 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평범한 인생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무렵 고려는 격동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얼빈 일대에 거주하던 여진 부족인 완안부가 세력을 키우며 동북아시아에 파장을 미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완안부와 고려 사이에는 수많은 여진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의 동태는 고려에도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긴장이 높아지던 1104년(숙종 9) 초, 결국 고려군과 완안부 군의 첫 교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임간이 이끌었던 고려군은 대패하여 태반이 전사하였다. 이 때 척준경은 교위 준민·덕린과 함께 적진에 돌입하여 장수 1인을 베고, 후퇴하는 길에 추격해오는 적장 2인을 활로 쏘아 죽이는 무용을 떨쳤다. 고려군은 척준경의 무공 덕분에 겨우 퇴각할 수 있었다. 이 전공으로 척준경은 천우위녹사참군사를 제수받았다.
임간에 이어 파견된 윤관마저 대패를 당하자, 숙종과 고려 조정은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나섰다. 별무반을 조직하여 젊은 남자들을 거의 모두 편입시키고 군사 훈련에 돌입하였다. 숙종이 승하하고 아들 예종이 즉위하는 동안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두 세력 간의 갈등은 1107년부터 다시 터졌다. 고려 변경에서 여진족들이 수상한 동태를 보인다는 첩보가 올라오고, 고려 조정은 격론 끝에 여진 정벌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윤관이 다시 총 지휘를 맡아 약 17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총력전이었다. 척준경도 이 때 다시 전쟁터에 나섰다. 이른바 ‘윤관의 여진 정벌’이라 불리는 사건의 시작이다.
척준경의 무예는 이 전쟁에서 빛을 발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실린 그의 무용담은 『삼국지』에 나오는 장수들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여진족이 퍼붓는 화살과 돌이 비처럼 쏟아져 고려군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든 채 적중에 돌입하여 추장 몇 명을 격살하여 전황을 역전시킨다든지, 성이 포위되자 밤에 줄에 매달려 성벽을 내려가 구원군을 이끌고 와 적군을 격파한다든지, 총사령관 윤관이 기습을 당하여 겹겹이 포위를 당하자 단독으로 그 안으로 돌입하여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텼다든지 하는 일화들이 실려 있다. 『고려사』에 척준경보다 뛰어난 무용담이 실린 장수는 이성계가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척준경이 이후 권력투쟁에 개입하면서 결국 반역 열전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성계는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의 건국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척준경의 무공에 대한 기록은 축소되었을지언정 과장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려의 여진 정벌은 대승을 거두고 9성을 축조하는 등 일시적으로 큰 성과를 이루었으나, 여진의 거센 반격과 고려측의 작전 지속 어려움 등으로 인하여 결국 빈손으로 철군하고 말았다. 여진으로부터 앞으로 고려를 적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것이 성과의 전부였다. 그러나 척준경의 인생은 이 전쟁을 계기로 크게 달라졌다. 총사령관 윤관은 척준경의 구원으로 목숨을 건지고 “앞으로 자식처럼 대하겠다.”라고 울며 감사를 표하였다. 국왕 예종은 척준경의 아버지를 궁궐로 불러 위문하고 큰 상을 내렸다. 그는 고려의 전쟁 영웅으로 우뚝 섰던 것이다.
권력과의 결탁, 피바람을 일으키다
척준경은 거듭된 전공으로 승진을 거듭했고, 이후에도 승승장구하였다. 양계의 병마부사·병마사를 거쳐 1123년 12월에는 마침내 재상의 지위인 이부상서 참지정사에 올랐다. 이어 개부의동삼사 검교사도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로 승진했다가 문하시랑평장사에 임명되었다. 가난하여 공부를 할 수도 없었고, 하급 관리인 서리의 자리조차 얻을 수 없었던 젊은 날의 척준경이었다.
올곧은 무장으로 남아있었다면 지금 우리에게 척준경은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있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권력의 세계는 전쟁 영웅을 그냥 두지 않았다. 예종의 장인이자 새 국왕 인종의 외할아버지였던 당대의 중신 이자겸은 척준경의 딸과 자신의 아들을 혼인시켰다. 당시이자겸은 국왕의 권위마저 능가하는 실세였다. 척준경의 권력도 날개를 달았으나, 그 날개는 척준경을 어두운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14세에 즉위한 인종은 아버지 예종 사후 다른 경쟁자를 물리치고 자신을 왕위에 올린 외할아버지 이자겸의 위세에 눌려 있었다. 이자겸도 공공연히 자신을 국왕보다 높이곤 했다. 인종은 나이를 먹으며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이러한 인종의 뜻을 눈치 챈 측근 김찬 등은 거사를 일으켜 이자겸 세력을 제거하려 시도하였다. 1126년(인종 4) 2월, 인종의 측근들은 전격적으로 공세를 취했다. 이들은 먼저 궁궐에 있던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과 아들 척순을 비롯한 이자겸 세력을 죽였다. 시작은 그들에게 유리해 보였다.
하지만 이자겸의 곁에는 척준경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물러난 지 오래 되었으나, 여진족을 상대로 무쌍의 용맹을 떨쳤던 맹장 척준경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척준경은 소식을 듣고 즉시 일어나 불과 수십 명을 데리고 궁궐로 돌입했다. 그곳에서 그는 성 밖으로 내쳐진 동생과 아들의 주검을 목격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당시 그의 심정을 “恐不免”, 즉 “(자신도 이러한 상황을)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라고 적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그의 심정을 잘 묘사한 것일까. 이보다는 복수심에 눈이 뒤집어졌다고 상상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척준경은 군기고를 털어 휘하들의 무장을 갖추었다. 이자겸 세력의 병력이 속속 궁궐 앞으로 모여들었다. 인종은 직접 성 위에 모습을 보여 상황을 수습하려는 용기를 보였으나, 척준경은 군사들을 단속하며 인종 쪽으로 화살을 날렸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상황은 척준경이 궁궐에 불을 지르면서 끝이 났다. 거센 바람을 타고 불길은 궁궐을 집어삼켰고, 인종과 측근들은 궁에서 나와 이자겸세력에게 잡혔다. 이른바 ‘이자겸의 난’이 벌어진 것이다. 인종의 측근들은 처참하게 살육당했고, 인종도 이자겸에 의해 유폐되다시피 하였다. 이자겸과 척준경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권력은 나누기 어렵다고 한다. 인종과 아직 살아남았던 그의 측근들도 이 점을 알았기 때문일까. 이들은 이자겸과 척준경을 갈라놓으려 공작을 시작하였다. 내의 최사전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국왕의 힘이 되어달라는 이들의 설득에 척준경은 점점 설득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뜻밖의 사고가 터졌다.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노비가 척준경의 노비와 다투다가 “너의 주인은 저위에 활을 쏘고 궁궐을 불태웠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 너 또한 관노로 적몰되어야 마땅한데 어찌 나에게 모욕을 주느냐?”라는 말을 내뱉은 것이다. 이 말은 척준경의 귀에 들어갔고, 척준경은 크게 분노했다. 결국 척준경은 왕의 뜻에 따라 이자겸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자겸의 난’이 벌어진 지 불과 몇 달 뒤의 일이었다.
출처 - 우리역사넷 -
고려시대 김구에 대해 알아보자
명문장으로 외교에 공을 세우다
김구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무신집권기 후반부터 대몽항쟁기를 거쳐 원 간섭기 초기까지 관리로 활동하면서 몽골에 보내는 외교 문서 작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문집으로 『지포집』이 전해진다.
촉망받던 젊은 인재, 풍파에 시달리다
김구의 자는 차산, 본관은 부녕현이었다. 어린 시절 이름은 백일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성인이 된 후 이름을 고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의 선대에 대해서는 기록이 명확하지 않아 다소 이견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인 김정립은 120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으니, 김구는 개경 관리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글을 잘 지었던 김구는 17세에 예비고시인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22세였던 1232년에 본고시인 예부시에 급제하여 관리의 자격을 획득하였다. 이렇게 대를 이어 학업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당시 명예로운 일로 칭송받았다. 더구나 급제 석차가 장원에 이은 2등이었으니, 젊은 김구는 상당히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과거에 급제하면 개경 시가에서 풍악을 울리며 행진을 시켜주고 고향에 돌아가면 지방관과 향리들이 영접하여 잔치를 열어주는 등, 나라에서 큰 영예를 내려주었다. 젊은 김구는 아마 앞으로 관리로서 활약할 미래를 가슴 벅차게 꿈꾸었을 것이다.
사연은 알 수 없지만, 누군가 그런 김구를 질투하였던 모양이다. 황각보라는 고향 사람이었다. 김구가 관직을 임명받을 찰나, 황각보가 관아에 고발을 하였다. 김구의 선대에 흠결이 있다는 제보였다. 이 흠결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문제가 생긴 김구의 출사에 대해 살펴보자. 내용이 전해지지 않는 이 제보는 상당히 치명적인 내용이었던 듯하다. 당시를 호령하던 무신집정 최이가 김구의 재주를 아껴 구제하려 했는데도 실패하여, 원래 임명하려 하였던 관직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 발령을 해야 했다고 하니 말이다.(이후 서술에서 특별한 별도 전거가 붙어있지 않다면 대체로 열전에 수록된 내용이다.)
후대의 기록이라 사실 여부를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제주로 간 김구는 돌담장을 세워 토지 구획을 명확히 하여 이전에 문제가 되었던 토지 겸병과 사슴·말의 곡식 훼손을 막는 공을 세웠다고 한다. 임기를 마친 뒤에는 드디어 개경으로 올라와 한림원의 관직을 받았고, 곧이어 서장관으로 몽골에 가는 외교 사절단에 배속되었다. 1240년,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당시 고려는 1231년(고종 18) 이래로 몽골의 침입을 버티고 있었다. 이른바 ‘대몽항쟁기’라 불렸던 시기였다. 어려운 상황에서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김구는 어떤 소감을 느꼈을까. 이때 지은 글을 모아 『북정록』으로 펴내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서경을 지나며 황량해진 풍경에 안타까워했던 시, 대몽항쟁 과정에서 처절하게 항쟁하다가 도륙당한 철주를 지나며 그들을 기린 시 등이 몇 수 전한다.
이후 김구는 한림원에서 8년 동안 근무하였고, 국학의 종5품 관직인 직강에 올랐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김구 개인의 관직 생활은 비교적 평온했던 듯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풍파가 닥쳐왔다. 최이의 아들로 권력을 승계받아 당시 집권하고 있었던 최항의 심기를 거슬렀던 것이다. 1247년에 최항은 김구에게 자신이 조성한 『원각경』에 발문을 짓게 하였는데, 그 글의 내용을 보고 “나에게 입을 닫고 있으라는 것이냐!”며 분노하여 좌천시켜버렸다. 최항은 극도로 권력에 예민하여 많은 조정 중신들을 유배 보내고 죽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김구가 정말 그런 의도로 적은 것을 최항이 간파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으로 곡해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김구는 속절없이 좌천되었고, 최항이 죽을 때까지 다시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때 아마도 부안으로 내려가 살며 후학들을 가르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우리역사넷 -
고려시대 김구에 대해 알아보자 2편
외교 일선에서 활약하며 장년에 전성기를 맞이하다
김구가 정계로 복귀한 것은 최항이 사망한 후인 1257년이었다. 『지포집』의 연보에 따르면 다시 한림원으로 복귀하였다고 한다. 10년 만의 귀환. 그의 나이가 벌써 47세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이듬해에 최항의 아들 최의가 제거되면서 최씨정권이 붕괴되었고, 이어 오랜 항쟁을 끝내고 몽골과 강화를 맺는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외교적으로 몽골과 교섭하는 일이 국정의 큰 과제로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는 자신의 능력을 크게 발휘하였다.
『지포집』에는 김구가 작성한 외교문서와 원의 고위 관리들에게 보낸 서한류가 약 50여 건 실려 있다. 이는 『동문선』에 채록되어 있었던 것을 옮긴 것이다. 이 문서들은 1259년부터 1278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그 첫 문서는 강화를 위해 국왕 고종을 대신하여 태자가 몽골에 입조했을 때 지참한 고주표이다. 작성자인 김구도 사신단의 일원으로 태자를 수행하였다. 막중한 임무를 띠고 간 사신단의 일원으로서, 또 중요한 문서인 고주표를 작성한 당사자로서 김구 역시 큰 책임감을 느끼며 다녀왔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몽골 칸이 죽음과 계승 분쟁으로 복잡한 상황이 벌어졌지만, 다행히 태자 일행은 전 칸의 동생이자 장차 차기 칸이 될 쿠빌라이를 만나 강화를 맺고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몽골에 다녀온 태자가 바로 다음 국왕인 원종이다. 원종대에 김구는 여러 외교 문서들을 작성하면서 그 능력을 입증하였다. 쿠빌라이의 즉위를 하례하는 표문, 연호 반포를 축하하는 표문, 공물을 보내는 표문 등이 부분적으로 전해진다. 특히 1263년 4월에 우역 설치와 군대 파견·군량 수송 등의 현안에 대하여 고려의 입장을 알리며 설득한 표문을 작성하였는데, 8월에 원에서 이를 수용한 것이 높이 평가를 받았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후로도 양국 간의 중요 현안 논의에서 고려측의 외교 문서는 김구가 작성한 것이 많았다. 그 해 12월에 당시의 중신들이었던 이장용과 유경이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이에 좌간의대부로 임명받은 데에는 이 공이 특히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당시 그의 할아버지가 승려였다는 이유로 대간직 임명에 반대하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나, ‘재능이 있으므로’ 원종이 임명을 강행하였다고 한다.
급제 직후에 문제가 되었던 선대의 흠결도 아마 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미 오래전 과거 급제 당시부터 당시 문장의 대가 이규보로부터 훗날의 기대주로 주목받았던 김구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외교 문서를 작성할 때에 아름다운 표현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 현안에 대하여 잘 정리하고 이쪽의 입장을 상대가 수용하도록 근거를 제시하며 논리적으로 제안하는 내용이 가장 중요하다. 물론 이는 국왕과 조정 관리들의 논의를 거치며 정리되는 것이지만, 최종적으로 이를 조리있고 품격있는 글로 작성하는 것은 문서 작성자의 몫이다. 김구는 왕조 간에 오가는 공식적인 문서뿐만 아니라 원의 고위 관리들에게 보내는 서한도 작성하여 양국 간의 현안들을 조율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김구의 공헌에 대하여 『고려사』에 수록된 그의 열전에서는 아래와 같이 묘사하였다.
당시에 원이 징계하거나 꾸짖지 않고 넘어가는 해가 거의 없었지만, 김구가 보내는 글을 지었는데, 일에 따라 언사가 모두 이치에 맞았다. 〈황제가〉 답하는 조서에 이르기를, ‘말하는 것이 간절하고 진실하므로, 이치로 보아 마땅히 승인하고 허락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원의 한림학사 왕악이 매번 표문을 볼 때마다 반드시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칭찬하면서 그 얼굴을 보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노년에 접어든 김구는 점차 다음 세대의 외교 인재를 양성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참지정사에 오른 후 참외 문신들을 시험하여 포상하는 방식을 도입하여 외교 문서 작성 능력을 갖춘 젊은 신하들을 양성하자는 건의를 올려 국왕의 윤허를 받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조치는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통역관들이 사리사욕을 채우며 제대로 일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젊은 문신들에게 한어를 익히도록 통문관을 설치하였다. 통역관을 별도로 두더라도, 외교 사절로 파견된 관리들이 한어로 소통할 수 있다면 일도 수월해지고 통역관들의 농간도 제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목화씨의 등장 문익점
목화가 가져 온 의생활의 혁명
문익점은 1329년에 태어나 1398년에 사망한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관료이다. 그는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와 국내에서 최초로 재배에 성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그의 생애와 행적, 특히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목화씨를 들여와 재배하는 데에 성공하게 된 사정을 추적해보고,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를 살펴보겠다.
과거에 급제하기까지
문익점의 과거급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등과록전편』에는 그가 신미년에 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1331년이 된다. 그의 증손인 문치창이 지은 『사실본기』 등을 모아 남평 문씨 문중에서 1819년에 편찬한 『삼우당실기』에 실린 「가전」에서도 이를 따랐다. 그러나 『태조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에는 1398년 당시 그의 나이가 70세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는 1329년에 태어난 것이 된다.
문익점은 진주목 강성현,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 단성면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본관은 나주이다. 그의 아버지는 숙선인데, 과거에는 합격하였으나 벼슬하지 않았다고 전하며, 할아버지는 윤각으로 봉익대부 삼사우사 문한학사를, 증조부는 극검으로 검교군기감을, 외조부는 함안 조진주로 영동정을 지냈다고 한다. 남평 문씨는 고려 예종대에서 인종대에 걸쳐 활약한 문공인, 무신정권 때의 명신 문극겸 등을 거치면서 세족의 반열에 올랐다. 『삼우당실기』에는 문익점이 문극겸의 8대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문익점은 가업을 이어 독서를 하였다고 한다. 『삼우당실기』에 수록된 「가전」에 따르면 문익점은 11세인 충숙왕 복위 8년(1339)에 가정 이곡에게서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가정집』에 실린 「가정선생연보」를 보면 이곡은 대체로 원나라 조정에서 관직생활을 하다가 1339년 봄에 정순대부·판전교시사·예문관제학·지제교에 임명되어 고려 조정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고려에 머물렀던 것은 이후 2년 남짓한 기간에 머물렀으므로, 문익점이 이곡에게서 학문을 배웠다는 기록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문익점은 32세가 되던 해인 1360년 문과에서 병과 제4인, 즉 33인 중 7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당시의 과거에서 장원은 정몽주, 2등은 임박이 차지하였다.
어지러운 정세와 관직생활
문익점의 관직생활에 대해서 『태조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에는 “공민왕 경자년에 과거에 올라 김해부사록에 임명되었으며, 계묘년에 순유박사에서 좌정언에 승진되었다”고 전한다.
문익점이 최초로 수여받은 관직인 사록은 지방관청의 7품직이다. 순유박사는 성균관의 교수직으로 관품은 종7품이며, 좌정언은 고려시대 중앙의 최고 관부였던 중서문하성에서 국왕의 명령을 심의하고 왕의 잘잘못을 논하는 낭사의 종6품 간관이다. 고려 시대의 과거 급제자는 대개 지방의 관원으로 발령받았다가 중앙 관원으로 임명받곤 하였다.
그런데 그가 관직생활을 시작했던 시기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대였다. 당시 고려는 13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몽골제국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1세기 가깝게 받아오고 있었다. 고려의 국왕은 몽골 황실의 여인과 혼인하여 몽골 황실의 부마가 되었고, 동시에 고려에 설치된 원의 지방행정기구인 정동행중서성의 승상을 겸하고 있었다. 이로써 고려는 국가로서 독립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몽골제국의 일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고려의 국왕위가 원 조정의 힘에 의해 좌우되는 등 원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또한 한 세기 동안 이어진 양국 간의 밀접한 관계에 의해 기황후나 그의 오빠인 기철과 같이 고려 국내에도 원과 깊은 관련을 가지는 정치세력들이 등장하여 국왕권을 위협하고 있었다.
1351년에 조카 충정왕의 뒤를 이어 고려국왕에 등극한 공민왕은 재위 기간 동안 원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일련의 개혁운동을 펼쳤다. 특히 1356년에는 기철 일파 숙청 등으로 대표되는 반원개혁정치를 단행하여 원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 강남지역에서 홍건적이 발흥하여 화북과 요동 일대를 휩쓸고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하는 사태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수도 개경을 버리고 안동으로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홍건적의 침입은 겨우 물리칠 수 있었지만, 이후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조정 내부의 권력 다툼이 벌어져 정세운과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 주요 신료들이 살해당하였고, 공민왕이 개경으로 돌아오던 도중에는 왕의 측근이자 중신이었던 김용이 일으킨 흥왕사의 난으로 공민왕이 살해당할 뻔 하기도 하였다. 문익점이 과거에 급제한 해는 바로 홍건적의 두 차례 침입 사이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홍건적의 2차 침입을 겨우 몰아낸 직후 공민왕이 안동에서 개경으로 귀환하던 도중, 원나라로부터 뜻밖의 소식이 고려에 전해졌다. 공민왕을 폐위하고 새로운 국왕으로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을 옹립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덕흥군 옹립사건, 혹은 공민왕 폐위사건이 그것으로, 이는 문익점이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된 상황과 밀접히 연관되므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목화씨의 등장 문익점 2편
공민왕 폐위사건과 중국 사행
공민왕 폐위사건에 대해서 『고려사』 덕흥군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기철이 처형을 당하자 기황후는 공민왕에게 앙심을 품었다. 마침 고려 사람 최유가 원나라에 있다가 불량한 무리들과 함께 황후를 꼬드겨 공민왕을 모함하여 폐위시키고 타스테무르를 왕으로, 기삼보노를 원자로 옹립하려고 모의하고, 원나라에 있는 모든 고려 사람들에게 거짓 관직을 주었다. 또 요양성 군사 1만을 징발할 것을 청하여 압록강을 건너 수주의 달천에 이르렀다가 아군에게 패하였다.”
또한 이 사건을 주동한 인물로 지목된 최유의 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 황후가 왕에게 원한을 품은 것을 알고, 또한 김용이 안우 등 여러 장수들을 살해하고서는 내응할 것으로 믿었다. 마침내 불량한 무리들과 함께 기황후를 설득해 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을 세우려고 음모를 꾸미고는 거짓으로 상주하기를, 홍건적의 난 때 고려가 국인을 잃어버리고는 새 인장을 멋대로 만들어 쓰고 있다고 하였다. 원나라에서는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고 기삼보노를 그 원자로 삼았으며, 김용은 판삼사사로 삼았고, 최유는 스스로 좌정승이 되었다. 원나라 수도에 있는 고려 사람들은 모두 가짜 관직을 받았다. 또한 요양성의 군대를 고려로 출동시키도록 요청했다.”
덕흥군과 최유의 군대가 고려를 압록강을 건너 침입한 것은 1364년 정월 초하루의 일이었다.
그러나 공민왕 폐위의 소식이 고려에 전해진 것은 그보다 훨씬 앞선 1362년 12월의 일이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공민왕 폐위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다. 1363년 3월에는 기황후의 외종사촌이었던 이공수와 허강을 파견하여 진정표를 올리게 하였다.
또한 4월에는 홍순과 이수림을 파견하여 고려의 백관기로가 원의 중서성과 추밀원, 어사대에 보내는 서한을 전달하게 하였다.
『태조실록』에 실린 문익점의 졸기에 따르면 이 무렵 문익점은 좌정언으로서 서장관이 되어 계품사 이공수를 수행하여 원에 파견되었다고 한다. 서장관이란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직책으로, 외교사절단 내에서는 정사, 부사에 이은 세 번째 직위였다. 그런데 『고려사』에 실린 임박의 열전에 따르면, 임박 역시 이공수의 서장관으로 수행하였다고 하여 『태조실록』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문익점이 중국에 파견되었던 시점으로 보아 그의 임무가 공민왕 폐위사건과 관련이 된 것임은 분명하다.
당시 원 조정에서는 고려에서 여러 차례 파견한 사신들을 억류하고서는 덕흥군 편에 설 것을 회유하였다. 이 가운데 이공수는 고려를 떠나면서 “우리 임금이 복위되지 않으면 저는 죽어도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던 다짐처럼 기황후와 황태자의 집요한 설득을 뿌리치고 공민왕을 지원하였다. 반면에 유인우와 강지연, 안복종 등은 덕흥군 편에 서서 고려를 침입하는 데 가담하기도 하였다. 이때 원 조정에서는 고려의 사신들에게 높은 관직을 내려주며 회유하였는데, 문익점도 이때 덕흥군 측으로부터 관직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고려 침공군과 행동을 같이 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덕흥군 측에 적극 동조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 폐립사건은 고려에서 덕흥군의 침공군을 무력으로 물리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고, 원은 공민왕의 복위조서를 보내며 이를 공식화하였다. 이로써 이공수를 비롯한 고려 사신들도 귀환하게 되었고, 문익점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목면의 전래와 보급
그런데 『삼우당실기』에는 문익점이 원에 머물던 시절에 대해 다른 기록을 전한다. 문익점이 덕흥군 편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다가 교지, 즉 지금의 운남 일대로 귀양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중국 강남 지역에서 목화씨를 얻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후대에 미화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 문익점이 덕흥군 정권이 내려준 관직을 받아들였다고 한 데에서 보이듯이, 최소한 덕흥군 편에 가담하기를 거부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점은 그가 귀국 후에도 문제가 되어 공민왕대에는 더 이상 관직생활을 이어가지 못했던 데에서도 알 수 있다. 둘째, 당시 중국의 강남 일대는 장사성, 진우량 등 한족 군웅들이 점거하고 있었으므로 운남까지 여행하기란 쉽지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셋째, 그 무렵 목면이 중국의 강남지역에서 주로 재배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화북 지역에서도 목면의 종자를 구할 가능성은 충분했다는 점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뚜껍 속에 넣어 숨겨가지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근거는 뚜렷하지 않다. 『태조실록』의 기록에는 그가 목화씨를 “주머니에 넣어서” 가지고 왔다고 한다. 목화씨 도입에 얽힌 이 일화 역시 후대에 첨가된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이 문익점은 귀국 후 원나라에서 덕흥군 편에 선 전력이 문제가 되어 중앙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364년 그는 고향인 진주로 내려가 목면 재배를 시도해보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태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갑진년에 진주에 도착하여 그 씨 반을 그 고을 사람으로서 전객령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정천익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다만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정천익이 가을이 되어 씨를 따니 백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1368년) 봄에 이르러서는 그 종자를 나누어 마을에 주면서 권장하여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문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않았다. 중국의 중 홍원이 정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면을 보고는 너무 기뻐 울면서 말하기를, ‘오늘날 다시 본토의 물건을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천익은 그를 머물게 하여 며칠 동안을 대접한 후에 이내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물으니, 홍원이 그 상세한 것을 자세히 말하여 주고 또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정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를 짜서 1필을 만드니, 이웃 마을에서 전하여 서로 배워 알아서 한 고을에 보급되고, 10년이 되지 않아서 또 한 나라에 보급되었다.”
여기서 목화 재배에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등장하는 정천익은 문익점의 두 번째 부인의 아버지, 즉 문익점의 장인이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 의류 원료는 삼베, 모시, 명주가 대부분이었고, 값비싼 비단은 소수 상류층들만이 입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문익점에 의해 처음 재배에 성공한 목화는 매우 빠른 속도로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기존 원료에 비해 생산이 쉽고 보온성이 뛰어난 솜과 무명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자 일반민들의 의생활이 크게 개선되었던 것이다. 문익점이 죽은 얼마 후 권근은 목면이 널리 보급된 상황을 가리켜 “온 나라에 널리 퍼지게 되어, 모든 백성들이 상하가 모두 이를 입게 되었다” 라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익점은 1375년에 전의주부로 임명되어 중앙정계에 복귀하였다. 이후 관직이 계속 올라 창왕 때에는 좌사의대부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준 등이 추진했던 사전개혁에 반대한 까닭에 탄핵을 받아 파면당하였고, 조선 개국 이후로도 등용되지 못하였다. 문익점은 1398년(태조 7) 6월에 70세를 일기로 고향인 강성현에서 눈을 감았다.
출처 - 우리역사넷 -
단심가의 정몽주
고려를 향한 일편단심, 선죽교에서 쓰러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로 시작하는 단심가의 저자 정몽주. 명운이 다해가는 고려왕조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그는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충신의 대명사로 회자되고 있다. 정몽주가 활약하던 시기 고려는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화를 직면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중국대륙을 지배해오던 원이 쇠락하고 신흥 왕조 명이 대두함에 따라 국제질서가 재편되었고,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고려 내부에서는 국정을 쇄신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사회적으로는 개혁정치를 갈망하던 신진세력들이 대거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기득권층과 충돌하였으며, 이들이 근간으로 삼던 성리학이 새로운 시대사조로 자리매김한 결과 문화적 차원의 변화 또한 수반되었다. 이처럼 한 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격변의 시대 한가운데에 선 정몽주는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안타까운 생애를 마감하였다.
이성계와 정몽주, 공조와 이반의 갈림길에 서다
애초 이성계와 정몽주는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1364년에 정몽주와 함께 삼선·삼개 세력을 제압한 이후 이성계는 그를 신임하여 전쟁터에 나갈 때마다 그를 데리고 갔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를 천거하였다. 정몽주 또한 이성계 세력이 갖는 문제의식에 동조하였다. 온갖 폐단의 온상이었던 불교를 비판하거나 명과의 통교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는 윤소종·정도전 등 이성계 세력의 핵심인물들과 뜻을 같이 하였다. 또한 정몽주는 위화도회군의 정당성을 인정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창왕에게 이성계에 대한 특혜를 요청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일에도 가담한 행적이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비록 토지제도를 개혁하는 문제에서는 이성계와 이색 어느 편도 들지 않고 모호한 입장을 취하였으나, 분명 공양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정몽주는 이성계 세력과 공조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공양왕의 즉위 이후 이성계와 정몽주는 점차 다른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야욕이 국왕을 교체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 그에 대한 견제를 시작하였다. 우선 이초의 옥을 빌미로 이성계 세력이 정적 이색을 맹렬히 공격하자 정몽주는 이색·권근을 사면해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죄상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시점에 다시 죄를 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다음으로 창왕을 옹립한 죄로 공격받고 있는 이색을 구명하기 위해 공양왕이 조민수의 협박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동정론을 펴자, 정몽주 또한 그 견해에 동조하였다. 당시 정몽주는 공양왕을 설득하여, 또 다시 이색의 죄를 묻는다면 무고죄로 다스린다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였다.
1392년에 정몽주는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거동이 불편한 상황을 틈타 이성계 세력을 숙청하려 한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김진양·이확·이래·권홍·유기를 이용해 조준·정도전·윤소종 등을 탄핵하였다. 이어 이들에 대한 극형을 요구함과 동시에 이성계를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다.
정몽주의 시도는 이성계의 아들 태종[조선]이 개입함에 따라 실패로 끝났다. 일찍이 이방원은 이색보다도 정몽주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을 예견하였다. 이에 이성계의 동생 이화 및 사위 이제와 모의하여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고, 정몽주가 이성계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조영규·고여 등을 보내 그를 암살하였다.
그의 나이 쉰여섯이 되는 해였다. 일설에는 이방원으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이성계가 대신을 함부로 죽였다는 사실에 분개했다고 하는데, 실상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조선 건국 이후 하륜이 정종[조선]에게 이방원이 없었다면 정몽주의 난을 다스리지 못하였을 것이라 이야기한 사실을 근거로 정몽주 암살의 주모자가 분명 이방원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로써 고려는 왕조의 마지막 수호자를 잃었다. 정몽주가 죽은 직후 그를 지지하던 인물들은 모두 국문을 당한 뒤 유배되었으며 이미 정계에서 축출된 이색 세력들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탄압이 가해졌다. 이윽고 같은 해 7월, 이성계 세력의 압력을 견딜 수 없게 된 공양왕이 왕위를 내려놓음으로써 고려왕조는 5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장대한 역사를 끝맺게 된다.
출처 - 우리역사넷 -
붉은 두건의 도적들!
붉은 두건의 도적들, 고려로 밀려오다
홍건적은 14세기 중반, 즉 원 말기에 강남 일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군이다. 이들 중 한 갈래는 북중국과 요동 일대를 거쳐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쳐 한반도를 침입하였다. 여기서는 홍건적이 발흥하게 된 배경과 중국 대륙에서의 움직임, 그리고 그들이 고려로 향하게 된 경과를 우선 살펴보고, 두 차례에 걸친 침입과 격퇴의 과정을 추적해보겠다. 아울러 홍건적의 난이 고려 국내의 정치와 원과의 대외관계 등에 미친 영향을 확인해보겠다.
한반도로 튄 불똥 - 홍건적의 1차 침입
1359년에 홍건군은 요양을 중심으로 한 요동 일대를 휩쓸고 있었다. 원 조정에서도 토벌군을 조직하여 홍건군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고, 요양을 수복하기도 하였다. 이에 홍건군은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한반도로 침입해 들어왔다. 이들을 우리 역사에서는 ‘홍건적’이라 기록하였다. 그해 11월에 홍건적 3천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와 약탈을 하고 돌아간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 곧이어 12월에는 모거경이 이끈 홍건적 4만 명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와 의주를 함락시켰고, 곧바로 다음날에는 정주와 인주까지 함락시켰다. 홍건적의 남하는 계속되었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넌 지 20일 만에 서경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서경은 고려에서 건국 초기부터 정치와 군사 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말하자면 고려 제2의 수도와 같은 곳이었다.
그렇다면 홍건적은 경험과 지식도 없는 상황에서 왜 한반도를 침입하였을까? 우선 전략적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당시 홍건적은 고려를 원의 동맹자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려를 공격함으로써 그 배후의 요동을 안정화시키려는 전략을 취하였던 것이다. 또 하나의 원인은 홍건적이 고려를 피난처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요동의 군사적 대치가 긴박하게 전개되던 상황에서 홍건적들에게 고려는 좋은 안식처로 생각되었다.
고려군은 발 빠르게 대응하였다. 홍건적 침입 초기에는 경복흥, 안우 등 공민왕 측근의 인물들이 출전하였다. 그러나 홍건군의 거센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서경까지 밀리고 말았다. 고려는 곧 대대적으로 병력과 말을 동원하는 등 거국적인 대응에 돌입하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개성에서는 피난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고려군은 곧바로 반격에 돌입하였다. 1360년 1월에는 양군이 각각 수천 명씩의 전사자를 내는 치열한 공방 끝에, 고려군은 빼앗긴 지 20일 만에 서경을 수복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뒤이어 안우, 이방실 등이 이끈 고려군은 함종에서, 그리고 선천군에서 홍건군을 크게 격파했다. 함종에서의 전투 성과를 『고려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판개성부사 신부와 장군 이견이 전사했다. 그러나 각 부대들이 힘껏 싸워 적군 2만 명을 죽이고 자칭 원수인 심자와 황지선을 사로잡았다.”
이 전투 이후로도 홍건적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에는 두 달 정도가 더 걸렸다. 홍건적은 물러나면서까지 서북 지역에 처참한 피해를 입혔다. 압록강을 건너 후퇴한 홍건적을 고려군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그해 4월, 전쟁에 승리하고 개선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공민왕이 승리의 기쁨을 표현했던 모습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러 신하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이방실에게 옥띠와 옥갓끈을 하사하였다. 공주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어찌 이토록 지극한 보배를 아끼지 않으시고 남에게 주십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우리 종사가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지 않고 백성들이 어육이 되지 않은 것은 모두 이방실의 공로입니다. 내가 비록 내 살을 베어 주더라도 오히려 다 보답할 수 없을텐데, 하물며 이 물건 정도를 아까워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홍건적의 대대적인 2차 침입
홍건적은 일단 압록강을 건너 물러났지만 그 세력이 완전히 뿌리뽑힌 것은 아니었다. 요동 일대로 후퇴했던 홍건적은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들어와 고려의 서북면 지방을 노략질하였다. 고려에서는 이공수, 주사충 등을 원에 파견하여 대륙의 정세를 살펴보도록 하였으나, 그들은 항상 심양에서 길이 막혀 돌아오고 말았다. 이로써 고려 조정은 한반도에 침입했던 홍건적이 몽골제국 전체에 퍼진 반란군 세력 중 일부였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는 1356년의 반원개혁정치 이후 소원해졌던 원과의 관계를 복원하여 홍건적에 공동으로 대응하고자 하였다. 그 조치의 일환으로 원에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적인 뜻을 표명하였고, 또한 정동행성에 관원을 다시 배치하였다. 그리고 국내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각도의 군비 현황을 점검하고 병력을 신속하게 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지배층들로부터 말을 징발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361년 10월에 홍건적은 두 번째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를 침입하였다. 이번에는 1차 침입 때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반성·사유·관선생·주원수 등이 거느린 10만의 대군이었던 것이다. 홍건적은 침입을 시작한 지 1개월 남짓 만에 개경을 압박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 대해서 『고려사』에서는 “어가가 남쪽으로 떠나는데, 공주는 연을 버리고 말을 탔으며 차비 이씨가 탄 말은 파리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어 보는 사람이 다 눈물을 흘렸다.”라고 묘사하였다.
공민왕을 비롯한 고려 조정은 복주, 즉 지금의 안동으로 피난지를 정하였다. 복주는 북쪽의 홍건적이나 남쪽의 왜구 등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분지 지형이었으며 경상도 교통의 요지로 물산이 풍부했던 점, 그리고 왕실을 비롯해서 홍언박 등 고려의 중신들과 깊은 관련을 지닌 곳이었다는 점에서 피난지로 선택되었다. 공민왕은 복주에 머물면서 자주 영호루에 나아가 군사훈련을 참관하였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공민왕이 친히 썼다고 하는 영호루의 현판이 전해지고 있다.
공민왕이 개경을 떠나고 5일 만에 홍건적은 기어이 개경을 함락시켰다. 이후 개경에 머물면서 홍건군은 잔학한 행동을 거듭하였다.
“적군은 개경을 함락한 후 수 개월 동안 진을 치고 머물면서 말과 소를 죽여 그 가죽으로 성을 쌓고는 물을 뿌려 얼음판을 만들어 아군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다. 또 남녀 백성들을 죽여 구워 먹거나 임신부의 유방을 구워 먹는 등 온갖 잔학한 짓을 자행했다.”
공민왕과 고려 조정은 광주, 충주 등을 거쳐 12월 복주에 도착하였고, 이후 반격을 준비하였다. 우선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임명하고, 전국 각지에서 근왕병을 모집하였다. 또한 국내 각 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켜 배후에서 홍건적을 격파하는 전과가 이어졌다. 반격의 채비를 마친 고려군 20만은 이듬해인 1362년 1월에 개경의 교외에 진을 치고 개경을 포위하였다. 1월 18일 새벽부터 벌어진 전투는 치열하였다. 이 한 번의 전투로 홍건적 20만 가운데 절반은 전사하고, 나머지 절반은 압록강을 건너 도망쳤다. 그 성과에 대해서 『고려사』에는 “저희끼리 밀고 밀치다 죽은 적들의 시체가 가득했고 10만이 넘는 적들의 머리를 베었으며 원나라 황제의 옥새와 금은보화, 금·은·동으로 만든 인장, 무기 등의 물품을 노획했다. 그 잔당인 파두반 등 10여만 명은 압록강을 건너 도망쳐 버리니 적도들이 드디어 평정되었다.” 라고 전한다. 이로써 홍건적의 2차 침입은 마무리되었다.
출처 - 우리역사넷 -
황산대첩
이성계, 폭주하던 왜구의 불길을 진화하다
황산대첩은 1380년 9월에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고려군이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격퇴한 전투이다. 이 전투로 인하여 오랜 시간 고려를 괴롭히던 왜구의 기세가 현저하게 약화되었고, 이성계는 국가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왜구들이 고려의 내륙으로 모여들다
우왕대 고려는 지긋지긋한 왜구의 침략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1380년 8월, 대규모의 왜선이 진포에 정박하고 이를 거점으로 하여 왜구들이 고려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있다는 소식이 조정에 또 전해졌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심덕부, 나세, 최무선을 진포로 급파하였고, 이들은 그동안 화통도감에서 최무선을 중심으로 개발해 온 화포를 이용하여 왜구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바로 진포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고려 수군의 함포는 왜구의 함선을 거의 다 불태워 버렸다. 바다에서 퇴각로가 막히자, 살아남은 왜구들은 악에 받쳐 포로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몸을 돌려 내륙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향한 곳은 옥주였는데 이곳에서 이미 내륙에 침투해 있던 왜구 무리와 합세하게 된다. 일본학계에서 왜구의 실체가 일본인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할 정도로 이때 왜구는 고려 내륙 깊숙한 곳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진포의 달콤한 승리도 잠시. 고려 백성들의 악몽이 시작되고 있었다.
상당한 규모로 결집된 왜구들은 충청북도 일대를 거쳐 경상북도 쪽으로 이동하며 마침내 상주에 다다랐다. 왜구들이 거쳐 간 고을마다 초토화되었고 길은 피바다를 이루었으니, 당시 무고한 백성들이 입은 피해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상주에서 이들은 2~3살 정도는 되는 어린 여자아이를 붙잡아다가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깨끗이 씻기고는 쌀과 술을 함께 차려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제사를 지내고 여자아이를 불태우자 창자루가 갑자기 부러졌다. 이 기이한 현상을 반드시 패배할 징조라고 생각한 그들은 이곳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이후 왜구는 선주와 경산부를 도륙하고 경상남도의 사근내역에 주둔하였다. 이곳에서 고려는 또다시 쓴 패배를 맛본다. 이 사건이 이른바 사근내역 전투이다.
왜구의 침략이 시작된 이래 피해가 최악의 사태에 치닫자, 고려 조정에서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배극렴, 김용휘, 지용기, 오언, 정지, 박수경, 배언, 도흥, 하을지 9명의 원수를 출정시켜 공격하게 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이 전투에서 원수인 박수경과 배언이 전사하고 사졸 500여 명이 사망하는 대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왜구들은 기세를 이어 함양을 도륙하고 남원산성을 공략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후 그들은 운봉현을 불태우고 인월역에 주둔하였다.
황산에서 이성계가 적장의 목을 베다
이때 이성계는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가 되어 도체찰사 변안열 등과 함께 왜구를 정벌할 군대를 이끌고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길에 널려 있는 시신들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이성계가 잠을 설치며 남원에 도착하자 구원자를 본 듯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며 맞이하였다. 그리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곧장 공격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 이성계는 그 길로 적진과 수십 리 떨어진 곳으로 가 정산봉에 올랐다. 그는 지형을 분석하여 작전을 짰는데, 큰 길 오른쪽에 있는 작은 샛길을 보고 “적은 반드시 이리로 나와서 우리의 후방을 칠 것이니, 나는 마땅히 이 길로 갈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나머지 장수들의 군대는 평탄한 길로 진군하게 한 뒤 자신은 적군의 기습이 예상되는 곳으로 갔던 것이다. 과연 그의 예상이 적중하여 이성계는 험지에서 왜구의 기병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험한 곳에서 싸우게 되다 보니 승기를 잡기가 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사료에 당시의 아슬아슬하고 급박했던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적의 장수가 창을 들고 몰래 이성계의 뒤쪽으로 접근하는데 미처 보지 못하는가 하면, 계속해서 이성계가 탄 말이 화살을 맞아 넘어져 다른 말로 바꾸어 타다가 결국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기도 하였다. 적군이 이성계를 두서너 겹으로 집중 포위하여 공격하는 것을 기병 두어 명과 뚫고 나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누구보다 용맹하게 하늘의 해에 맹세하고 주위에 소리쳐 지휘하기를, “겁먹은 자는 물러나라. 나 또한 적에게 죽을 것이다.”라고 하며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물론 태조 이성계의 구체적 행적과 관련해서는 사료에 다소의 과장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당시의 교전이 치열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전투에서 적군 가운데 눈에 띄는 한 사내가 있었으니, 아지발도라고 불리는 자였다. 용모가 아름답고 용맹스러움이 발군이었던 아지발도는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를 때마다 모두 쓰러져 고려 병사들이 대적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성계가 그 재주를 아깝게 여겨 그를 생포하고자 할 정도로 특출난 인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것일까? 아지발도 또한 이성계가 진을 설치한 것을 보고는 자신의 무리에게 “결코 지난날의 장수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의 전쟁은 너희들이 마땅히 각기 조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경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측근 이두란의 만류로 생포계획을 포기하고 그를 죽이기로 하였다. 문제는 아지발도가 목과 얼굴을 감싼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있어 화살을 쏴서 죽일 만한 틈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때 이두란과 이성계는 영화에서 나올 법한 환상의 호흡을 보여준다. 이성계가 활로 아지발도의 투구 꼭지 부분을 맞춰서 투구 끈을 끊어 떨어뜨리자마자 이두란이 활을 쏘아 죽였던 것이다. 이에 전세는 급격히 고려군으로 기울게 된다. 마침내 고려군은 왜구의 정예군을 거의 다 죽이고 크게 승리를 거둔다.
그 많던 왜구 중 70여 명만이 겨우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갔다. 이성계는 이들을 보며 “세상에 적을 섬멸하는 나라는 있지 않다.”라며 웃으며 추격하지 않는 여유를 보였다. 전쟁에서 승리하자 전리품으로 말을 1,600필을 얻고 무기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획득하였다. 이때의 전투로 냇물이 온통 붉게 물들어 6~7일이나 색이 변하지 않아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전투가 얼마나 큰 격돌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출처 - 우리역사넷 -
성리학을 탐구한 그들에 대해 알아보자
성리학을 탐구하며 이상 사회를 그리다
신진사대부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변혁을 이끌었던 세력을 지칭하는 학술용어이다. 사상적으로 이들은 성리학을 공부한 학자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무신집권기 이래로 노정된 고려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분투한 개혁세력이었다. 신진사대부가 등장하였을 당시 고려에서는 원의 힘이나 국왕의 총애에 기대어 국정을 장악한 권문과 대대로 명망 높은 귀족가문이었던 세족이 긴밀하게 얽혀 공고한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소위 ‘권문세족’으로 통칭되는 이들은 구습을 고집하며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해왔는데, 신진사대부는 기존의 신진세력들과는 달리 이들과 영합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리학을 이정표로 삼아 고려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으며, 이러한 의식적 활동 속에서 새로운 왕조 ‘조선’을 탄생시켰다.
신진사대부의 원형 능문능리(能文能吏)
일찍부터 한국사학계에서는 신진사대부의 원형으로 무신집권기의 ‘능문능리(能文能吏)’를 지목하였다. ‘능문’은 경학·사학·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훌륭한 문장을 창작할 수 있는 사람을, ‘능리’는 관리로서의 행정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을 지칭한다. 따라서 두 단어의 합성어인 ‘능문능리’는 곧 학자이자 정치가인 사대부와 ‘표면적으로’ 유사하다.
무신집권기는 기존의 질서가 흔들리던 시기였다. 수많은 문신들이 살해당하고 무신들이 수뇌부를 장악한 결과, 지배층의 구성과 정치운영 방식에서 큰 지각변동이 발생하였다. 능문능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그들은 대개 지방 향리 출신으로서 가문의 위세가 아닌 개인의 능력으로 중앙조정에 진출하였으며, 행정실무를 전담하면서 무신정권을 지탱하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능문능리는 후대의 신진사대부와 달랐다. 그들은 신진사대부처럼 현실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뚜렷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기득권층과 스스로를 차별화하지도 않았다. 단지 ‘학자적 관료’인 사대부의 모습을 구현하였다는 점에서 신진사대부의 ‘원형’으로 평가받을 따름이다.
성리학의 수용과 신진사대부의 등장
성리학이 수용된 이후 고려에는 비로소 신진사대부가 등장할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되었다. 기본적으로 성리학은 개인의 도덕적 수양 및 진리탐구가 정치의 일환이라는 전제 하에 국왕과 관료에게 새로운 역할을 기대한다. 나아가 엄격한 화이론과 벽이단론을 바탕으로 한 사회의 풍속을 재단한다. 성리학을 접한 신진사대부는 점차 차별화된 자의식을 갖기 시작하였고, 성리학의 가르침을 이정표로 삼아 정치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고려의 변화를 추동하였다.
고려에 처음 전파되었던 성리학은 대개 원의 관학화된 성리학이었다. 원은 과거시험인 제과에서 성리학을 채택하고 유학제거를 각지로 파견하여 성리학을 보급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을 고려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고려인들에게 제과 응시기회를 제공하였다. 나아가 안향을 첫 번째 유학제거로 파견하여 체계적으로 성리학을 교육하였다. 이로부터 고려의 지식인층은 제과에 응시하기 위해 성리학에 천착하고, 자연스럽게 성리학이 강조하는 덕목들을 체화하기에 이른다.
충선왕 시기에 고려의 성리학은 새로운 분기점을 맞이하였다. 충선왕이 원의 수도에 설립한 만권당을 통하여 고려의 지식인들이 요수·원명선·조맹부와 같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직접 교유하며 보다 다양한 성리학 사조를 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현은 만권당이라는 새로운 통로를 적극 활용하여 고려의 성리학 이해수준을 높인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백문보·이곡·이색과 같은 인재들을 발굴해 심화된 학문을 전수하였으며, 이로써 신진사대부가 성장할 수 있는 광범한 기반을 만들었다.
이성계의 선택
이성계, 권력을 장악하다
위화도회군은 1388년에 우왕의 명을 받아 요동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했던 이성계 등이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고려의 실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위화도회군의 대내적·대외적 배경
14세기 중엽 원이 점점 쇠퇴하자 동아시아는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당시 즉위한 공민왕은 이 기회를 틈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여 몽골의 고려침입 이후 원에 빼앗긴 쌍성총관부를 회복하고, 원과 결탁하여 행패를 부리던 기철 등의 무리들을 쫓아냈다. 또한 원을 몽골 고원으로 쫓아내고 중국 본토를 새로이 장악한 주원장의 명과 새로이 외교관계를 맺었다.
명과 고려의 관계는 처음에는 유화적이었으나 갈수록 악화되어 갔고, 친명적이었던 공민왕이 시해된 이후 더욱 얼어붙었다. 공민왕 사후 집권한 이인임 정권은 명과 사대관계에 있으면서 북원과도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등거리 외교를 시도하였고, 이는 명의 의심을 샀다. 또한 공민왕은 세 차례 군대를 보내어 북원이 지배하고 있었던 요동 지방을 공격하였다. 아울러 요동 지방에 사는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고려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의 세력이 요동에 뻗어가면서 명과 고려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외에도 고려는 중대한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원말에 중국 남방에서 일어난 반란군인 홍건적의 일파가 고려에 침입하여 개경을 함락시키는 등 큰 피해를 주었으며, 왜구는 고려의 연해지방을 거의 초토화시키다시피 했다. 또한 권세가들은 남의 토지를 빼앗고 양민을 노비로 삼아 농장을 만들었고, 일반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유망하거나 권세가의 농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권근은 당시 끊이지 않는 왜구의 침입과 자연재해, 권세가들의 토지겸병과 가혹한 수탈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죽어가는데도 조정에서는 이에 마땅히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통탄하였다.
고려 사회의 내우외환 속에서 새로운 세력들이 성장했다. 잦은 외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무장들이 영웅으로 떠올랐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존재가 태조 이성계와 최영이었다. 이성계는 쌍성총관부의 유력자였던 환조[이자춘]의 아들로서,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원으로부터 회복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귀순했다. 이후 장군으로서 휘하 장병을 거느리고 전투마다 승승장구하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실력으로 출세한 지방 세력가의 아들로서, 떠오르는 신세력의 대표자였다. 반면 최영은 30년 동안 왜구를 토벌하여 홍산에서 왜구를 대파하는 등 명성이 드높은 백전노장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부친의 유훈을 종신토록 지킬 만큼 청렴 강직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권문세족 출신으로서 구세력의 대표자였다.
고려 사회의 내부적 문제를 개혁할 주체로서는 신진사대부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들은 대체로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인물들로서,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이 많았고, 새로운 사상으로서 원에서 건너온 성리학을 수용하였다. 이들은 고려사회를 개혁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으나, 우왕 대에 이인임 정권이 북원과 외교관계를 재개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는 시련을 겪었다. 이에 신진사대부들 중 급진파는 신흥 무장 세력으로 떠오르던 이성계와 결탁하여 새로운 시대를 모색하였다. 특히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영에 직접 찾아가 그를 만났으며, 이성계의 군대가 질서정연함을 보고 자신의 기대를 시로써 표명하기도 하였다.
1387년(우왕 13년)에 최영과 이성계는 협력하여 이인임 일파를 몰아내고 최영이 재상인 문하시중, 이성계가 부재상인 수문하시중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국정을 책임져야 할 우왕은 사치에 빠져 있었고, 최영과 이성계 사이에는 향후 정국의 방향을 둘러싼 의견대립이 있었다. 최영은 이인임 정권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처형시켰으나, 이성계는 주모자 이외에는 처형을 피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정도전, 조준 등 급진파 신진사대부들과 연결된 이성계와는 달리 최영은 신진사대부들의 등용에 부정적이었다. 이는 이인임 정권과 연결되어 있던 사대부들의 처우에 대한 이견을 낳았다. 또한 최영은 정권의 최고책임자였던 이인임에 대해서는 귀양을 보내는 비교적 약한 처벌을 내렸는데, 당시 사람들은 정직한 최영이 사사로운 정을 두었다고 비판하였다.
요약하자면 고려는 요동 문제를 놓고 명과 외교적으로 대립하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전란과 권세가들의 토지겸병으로 인해 피폐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구세력을 대표하는 최영과 급진파 신진사대부들의 지지를 받는 이성계는 향후의 국정방향을 놓고 미묘한 의견대립을 보이고 있었다.
이성계의 선택 2편
요동정벌의 전개와 위화도회군
1388년에 명이 철령위를 설치하고 철령 이북의 땅을 자신들의 관할로 하겠다고 고려에 통보해 왔다. 철령위 설치 소식은 명에 사신으로 가 있던 설장수를 통해 2월에 고려에 전해졌는데, 명은 이 칙서에서 고압적인 태도로 고려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으며 철령위의 설치를 일방적으로 전달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명에 박의중을 사신으로 보내어 철령위 설치 중지를 요청하는 한편, 성을 수리하고 장수들을 서북 변경에 파견하는 등 명과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또한 우왕과 최영은 몰래 요동정벌을 모의하였다. 3월에 명에서 정식으로 철령위 설치를 통고해 오자, 우왕은 요동을 정벌할 것을 결심하고 전국의 군사를 징집하였으며 자신은 최영과 함께 스스로 서해도로 나가서 요동정벌을 준비하였다. 4월 1일에 우왕은 봉주에 이르러 최영과 이성계에게 요동정벌을 위해 힘써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에 반대하여 요동정벌이 불가한 4가지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성계의 논지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슬러 공격하는 것은 불가하고,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불가하며, 셋째로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구할 것이고, 넷째,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정 요동을 공격하고자 한다면 추수가 끝난 가을철에 군사를 움직여야 한다고도 주장하였다.
이성계의 반대론이 대체로 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왕은 요동정벌을 밀어붙여 12일에는 최영을 전군의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로, 조민수를 좌군도통사로,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았다. 조민수가 이끄는 좌군에는 서경도원수 심덕부, 부원수 이무, 양광도도원수 왕안덕, 부원수 이승원, 경상도상원수 박위, 전라도부원수 최운해, 계림원수 경의, 안동원수 최단, 조전원수 최공철,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조희고·안경·왕보 등을, 이성계가 지휘하는 우군에는 안주도도원수 정지, 상원수 지용기, 부원수 황보림, 동북면부원수 이빈, 강원도부원수 구성로, 조전원수 윤호·배극렴·박영충·이화·이지란·김상·윤사덕·경보,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이원계·이을진·김천장 등을 소속시켰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좌우군이 총 38,830명, 겸군 11,634명, 말 21,682필이었는데, 대외적으로는 10만 대군이라고 했다.
5월 7일에,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원정군은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섬 위화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탈영병이 속출한데다가 장마로 인해 병장비가 손상되고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으며, 압록강 물이 불어 건너갈 수 없었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장마 등 현실적인 문제로 원정을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철수를 요청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은 이를 거부하였다. 고려군은 진퇴양난의 지경에 빠진 것이다.
위화도에 있던 원정군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5월 22일에는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휘하의 병력을 거느리고 고향인 동북면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좌군도통사 조민수가 달려와 “공이 떠나면 우리들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라고 말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이성계는 조민수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을 설득하여 전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도로 건너왔다. 이것이 위화도회군이다. 이성계는 회군하면서 명에 대한 사대와 백성의 안위를 천명하고 무리한 원정을 시도함으로써 상황을 그르친 최영의 처벌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부터 이성계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자신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애초부터 무모한 원정에 반대하여 몇 차례나 군대를 철수시켜 줄 것을 우왕에게 요청하였던 바 있었다. 더 이상의 원정이 어려운 상황이 어떻게든 결단을 내리도록 이성계를 몰아가고 있었다. 또한 주위 사람들도 회군을 재촉했으며, 나아가서는 이를 기회로 권력을 장악하자고 권하였다. 실제로 남은과 조인옥 등은 회군을 건의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기까지 했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자, 성주에 있던 우왕은 원정군의 회군 소식을 듣고 급히 개경으로 돌아와서 사태에 대처하려 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이성계를 막을 방법이 여의치 않았다. 당시 우왕을 따르는 자가 50여 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최영이 백관에게 무기를 들고 호위하도록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반면 이성계 측에는 요동 정벌에 참여하지 않았던 동북면의 여진족들까지 참여하여 기세가 더욱 드높았다.
6월 1일에 개경에 도착한 원정군은 최영의 군사와 싸워 이를 격파하였다. 이때 최영의 군대는 분전하여 원정군의 선봉을 격파하였으나, 이성계의 본대가 공격해 오자 중과부적으로 무너졌다. 결국 승리한 원정군은 최영을 사로잡아 고봉군으로 귀양 보내고, 이후 처형하였다. 또한 우왕도 폐위하여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 이로써 원정군은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성계는 좌시중, 조민수는 우시중이 되어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회군에 성공한 이후, 회군을 주도한 이성계와 조민수 사이에 다시 분열이 생겨났다. 이성계 일파는 폐위한 우왕을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자손으로 간주하고, 그를 대신하여 종실에서 새로운 인물을 찾아서 왕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이때 윤소종, 조인옥 등 일부 신진사대부들 역시 이성계에게 왕씨를 다시 세우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반면 조민수는 이색과 의논하여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세울 것을 주장하였고, 결국 그의 뜻대로 창왕이 왕위에 올랐다. 즉 조민수, 이색 등의 구세력은 회군 이후에도 최영을 제거한 것을 제외하면 큰 변화를 주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이에 이성계 일파는 전제개혁을 주장하여 개혁에 반대하는 조민수를 유배시켜 경쟁자를 제거했으며, 다시금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여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즉위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를 통해 이성계와 급진파 신진사대부들이 정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이렇게 신세력이 구세력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위화도회군의 뒷수습이 끝나게 된다.
문화유산인 종묘! 얼마나 알고계시죠?
장엄한 왕실의 사당, '국가'의 다른 이름
종묘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에 위치한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조선 왕실의 사당이다. 1963년 1월 18일에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었고 199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아울러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인 종묘제례악과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인 종묘제례가 2001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된 바 있다.
종묘의 의미
원래 종묘란 조상신을 제사 지내는 공간으로 일종의 조상숭배 관념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연원은 고대 중국 주나라 때까지 올라간다. 고대 중국인들은 귀신도 살아있는 사람처럼 먹고 마시며 잠자는 등의 일상생활을 한다고 믿었다. 제사란 이 귀신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행위이고 그 장소로서 사당, 즉 묘를 세웠던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 선조의 혼령이 내려와 의지하는 곳이 신주인데, 신주 각각은 자신만의 독립된 거주공간을 가지며 이를 묘 혹은 묘실이라 한다. 종묘는 왕조의 창업자와 그 후계들의 공간으로, 창업자를 비롯한 극히 제한된 수의 통치자만이 입묘할 수 있는 배타적 공간이다. 국가의 등장과 더불어 종묘는 천명을 받아 국가를 세운 창업자와 그 후손이 이어가는 왕조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자리 잡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종묘는 사직과 더불어 ‘국가’를 뜻하는 대명사로 일컬어졌고, 나라를 세웠을 때 가장 먼저 건립하는 것이 종묘였다. 요컨대 종묘란, 역대의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왕실의 사당이다. 다른 말로 태묘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종묘의 흐름
종묘는 우리나라에서 삼국 시대부터 기록이 확인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국가의 신으로 역대 왕의 신위를 모시는 가묘적 성격을 띠는 원묘가 함께 존재해 왔는데, 묘제의 이러한 특징은 이미 신라 시기부터 보이고 있다. 원묘란 이중으로 거듭 세운 묘라는 뜻으로 이미 정묘인 종묘가 있는데 다시 세운 묘를 말한다. 신라는 종묘 외에 신궁이 있었고, 고려 시대는 태묘 외에 예조묘와 경영전이 있었다.
신라의 경우 소지마립간 9년에 시조가 탄생한 곳에 신궁이 세워져 제천 의례와 새로운 왕의 즉위의례를 거행하였다고 하였다. 신궁이 건립되기 전에는 시조묘에서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신궁이 건립되면서 시조묘는 왕실의 조상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고려의 경우, 예조묘를 두었다고 하는데 예조란 역대 태조의 통칭이다. 관련하여 『고려사』에는 왕이 신하들을 보내 예조묘에 제사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 명종 20년(1190) 10월에 서도에 사신을 보내어 예조묘에 제사하였는데, 그때까지도 의관이 그 사당에 보관되어 있어 후대의 왕들이 매년 연등과 팔관회 때에 신하들을 보내 제사지내게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도 국초 한양 도성을 계획할 때 궁궐, 성곽보다 종묘를 먼저 구상하였다. 조선은 건국하면서, 천자는 7대의 묘를 건립할 수 있고 제후는 5대의 묘를 건립할 수 있다는 ‘천자칠묘( 제후오묘(諸侯五廟)’와 ‘우사직 좌종묘(右社稷左宗廟)’,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을 따라 종묘를 건립하였다.
출처 - 우리역사넷 -
수양대군이 칼을 뽑은 사건
수양대군, 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내다
계유정난은 1453년(세종의 둘째 아들 세조[조선])가 조카 단종[조선]에게서 왕위를 찬탈하고자 일으킨 사건이다. 계유정난을 통해 수양대군은 문종[조선]의 유지를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 황보인 등 수십 인을 살해하고 조선의 실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난을 다스렸다’는 뜻인 ‘정란’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이 역모를 꾸몄다는 것을 핑계로 그들을 제거하였기 때문이다. 계유정난, 이징옥의 난 등을 통해 기반을 다진 수양대군은 결국 정란 2년 뒤에 단종으로부터 선위 받아 왕위에 올랐으니, 조선의 제 7대왕 세조이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과정 전체를 통칭하는 명칭으로 계유정난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후 사육신 사건 등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나며 혼란스러운 정국이 지속되었으나, 결국 세조는 자신의 왕권을 확고히 하고 아버지 세종의 정치를 물려받아 손자 성종[조선]의 치세로 이어지는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치세를 유지하기 위해 공신 책봉을 남발하여 이후 훈척세력의 거대화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수십 년 동안의 태평성대
세종의 재위기간은 조선 시대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훌륭했던 태평성대로 손꼽힌다. 조선 건국 이후 최대의 과제는 조선 왕조의 기틀을 잡는 사업, 즉 각종 문물제도의 정비였다. 태조 이성계부터 계속된 이 사업은 꾸준한 성과를 내고 있기는 하였으나 왕자의 난 등 태종[조선]대까지 이어진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그 진척이 지지부진했다. 학문을 사랑하는 호학군주였던 세종은 태종이 닦아놓은 안정적 왕권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학문 역량을 십분 발휘, 조선 초기 문물제도의 정비라는 중요한 과제를 훌륭히 수행하였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각종 의례를 정비하고 재정의 근간인 공법을 실시하는 등, 왕조 국가의 기틀을 단단히 다졌다. 『칠정산내외편』 편찬, 훈민정음 창제, 과학기술의 발달, 국가 전례 음악 정비 등 문화적 성과 또한 뛰어났으며, 농법 개량, 무기 개발 및 국토 개척 등에서도 뚜렷한 성취를 이루었다.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 또한 뛰어난 학문을 바탕으로 아버지 세종의 정치를 이어받았다. 그는 이미 세종이 이루어낸 각종 성취에 깊게 관여한 인물이기도 하였으며, 1445년 이후로는 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하면서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각종 서무에 대한 처리를 담당하였고, 이를 통해 국정 전반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태평성대의 이면
그러나 문종에게는 단 한 가지의 흠이 있었다. 몸이 지나치게 허약했던 것이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세자를 책봉하였으나, 유고가 있을 경우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는 점은 앞으로 찾아올 혼란을 예고하고 있었다. 결국 1452년 문종은 재위 2년 4개월 만에 서른아홉의 한창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단종의 나이는 겨우 열두 살에 불과했다.
한편, 세종대를 거치며 닦아놓은 태평성대의 이면에는 불안이 내재해 있었다. 세종의 신임을 받으며 성장한 김종서, 황보인 등 문신 세력이 전체 정사를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는 어린 아들 단종을 염려하며 부탁한 문종의 유지를 받들었다는 명분이 있었다.
단종 스스로도 즉위교서에서 모든 사안을 의정부 및 육조와 상의하겠다고 명시하면서, 육조의 사무를 의정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의정부 및 의정부 대신들의 권한을 크게 증대시켰다. 김종서 등이 소위 ‘황표정사’를 통해 관직인사를 농단하는 소문도 돌았다. 요직을 임명할 때에 국왕에게 후보자 3인의 명단을 올리는데, 후보자 중 한명의 이름에 황표를 붙여 사실상 자신들이 점찍어 놓은 이가 관직에 임명될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대신들이 막대한 뇌물을 받거나 그들의 자손들이 부당한 방식으로 관직에 임명되었다는 등의 소문은 결국 수양대군이 이들을 처단할 수 있게끔 하는 명분이 되었다.
물론 대신들의 정권 농단에 대한 여러 소문들은 수양대군의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겠으나, 당시 의정부 및 대신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해졌던 점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집현전 출신으로 세종대의 치세에 일조하였던 관료들 중 상당수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일조 또는 방조하였던 것을 보면, 일면 수양대군의 위세가 워낙에 대단했던 탓도 있겠지만 의정부의 권한 증대에 대한 관료들의 반감 또한 상당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의 권한을 다시 줄여야 한다는 간언이 여러 번 반복되었지만, 단종을 보위하기 위해 세력을 규합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욕심 때문인지, 대신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강성한 대군들을 의심하여 당상관 및 대군들의 집에 잡인들이 드나드는 것을 금하고자 하였으나, 강한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수양대군이 칼을 뽑은 사건 2편
대군에 머무를 수 없었던 그릇들
성군 세종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아서일까, 세종의 아들들 또한 하나같이 자질이 뛰어났다. 첫째 아들 문종은 세종의 학자적 기질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문학과 예술에 뛰어났다. 어릴 때부터 시·서·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당대 제일의 서예가이기도 했던 안평대군은 문인 층의 절대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단종 즉위 초기 황보인, 김종서 등 대신들과 연합하여 실권을 휘두르는 등, 정치적 기량 또한 원숙했다.
문종과 안평대군이 문에 치중된 인재들이었다면,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무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무예를 자랑하여, 세종이 강무할 때에 16발의 화살로 16마리의 사슴을 잡아, 신기에 가까운 활 솜씨를 가졌던 태조를 닮았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북한산과 같은 험준한 산세를 가진 곳도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쉽게 내려왔다고도 하니, 타고난 신체 능력과 후에 연마한 기술이 모두 뛰어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성품 또한 뛰어난 무예 실력에 어울리게 괄괄하고 호방하였으니, 그가 무사들이 추앙하는 대상이 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신들의 권한이 점차 비대해지기 시작했으며 대신들과 연합한 안평대군도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실권자로 떠올랐다. 수양대군도 물론 자신의 세력을 더욱 규합하기 시작하여, 두 대군파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나이 어린 단종에 비해 세종의 아들 여덟 대군이 지나치게 뛰어난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졌다.
특히 수양대군에게는 전략을 가다듬을 모사꾼이 필요했는데, 그런 그에게 한명회와의 만남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았다. 권람의 소개로 한명회를 만난 수양대군은 마치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였으며, 한명회를 두고 자신의 장자방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한명회는 수양대군에게 중요한 간언을 한다. 국가에 어린 임금이 있으면 반드시 옳지 못한 사람이 정권을 잡게 되니, 이때에는 항상 충의로운 신하가 있어서 반정을 하는 것이 천도에 부합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한명회와의 만남은 이미 왕위를 바라보고 있었던 수양대군의 마음을 더욱 굳히게 하였을 것이다. 그는 한명회의 조언을 받아들여 홍달손, 양정 등의 무사 세력을 더욱 규합하였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그리고 대신 세력이 각축하던 세력 경쟁은 드디어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다다랐다. 단종이 즉위한 해 9월 명에서 고명책인을 보내준 것에 대해 사은사를 파견해야 하는 때였다.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결정되자, 권람과 한명회 등은 수양대군이 명으로 떠나있을 때, 상대편 세력이 움직일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떠나려는 수양대군을 만류하였다.
이는 당시 어느 한쪽이 먼저 움직여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에 수양대군은 황보인이나 김종서는 호걸이 되지 못해 움직이지 못할 것이며, 안평대군 또한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며 이들을 안심시켰다.
몰아치는 피바람
명에 다녀온 후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은 마침내 상대 세력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10월 10일에 거사하기로 주위 인물들과 약정하였다. 상대 진영 또한 수양대군이 곧 움직일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수양대군은 상대 진영이 수적으로 열세이므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자신하였다.
바야흐로 10일 아침,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회, 홍달손 등을 불러 거사 계획을 확인한 후, 강곤, 홍윤성, 임자번, 안경손, 홍순로, 민발, 곽연성 등을 모아 그날의 거사를 의논했다. 그러나 아직 계획에 이견이 있어, 몇몇은 국왕에게 먼저 아뢴 후에 거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수양대군은 만류를 뿌리치고 직접 활을 들고 일어나 집을 나섰다.
수양대군이 먼저 노린 것은 대신 중의 실세 김종서였다. 김종서는 당시 ‘큰 호랑이’라 불릴 정도의 실력자였기 때문에, 그를 먼저 없앨 수 있다면 거사에 큰 탈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수양대군은 갑옷을 속에 입고 수하 몇 명과 함께 김종서의 집에 이르렀다. 김종서는 그를 의심하여 집안으로 수양대군을 들이고자 하였으나, 수양대군은 한사코 집 밖에 머물렀다.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 또한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수하들과 함께 김종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수양대군은 꾀를 내어 김종서에게 사모뿔을 하나 빌려 달라 청하여 김승규를 집으로 들여보낸 후, 은밀히 의논할 것이 있다며 신사면, 윤광은 등을 멀리 물리치도록 하였다. 김종서의 호위가 모두 사라지자 마침내 철퇴가 김종서를 내리쳤다. 거세게 몰아칠 피바람의 시작이었다. 놀라 뛰어나온 김승규마저 칼로 찔러 쓰러뜨렸다.
이어 수양대군은 궁궐로 향하여 입직승지 최항을 불러 김종서가 반역을 일으키려 하여 사세가 급박하므로 임금에게 미처 아뢰지 못하고 그를 죽였다고 고하였다. 단종이 그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수양대군은 왕명으로 대신들을 부르도록 하여,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을 궁문에서 때려죽였으며, 그 일파인 윤처공, 이명민, 민신 또한 사람을 보내어 제거하였다. 자신의 동생으로 정치적 라이벌인 안평대군을 강화에 압송한 후, 결국 사사하였다. 정분 , 조수량, 안완경 등도 귀양보냈다가 죽였다.
또한 함길도절도사로 있던 이징옥을 김종서의 일당이라는 이유로 파면하고, 그 후임에 박호문을 임명하였다. 이징옥은 오히려 박호문을 죽인 후, 종성을 근거지로 하여 스스로를 대금황제라 칭하면서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를 ‘이징옥의 난’이라 한다. 그러나 이징옥은 미처 세조에게 위협조차 해보지 못하고 종성부사 정종의 반간계로 살해당하였다.
출처 - 우리역사넷 -
이황에 대해
퇴계학, 퇴계를 연구하다
이황은 인간 심성론에 대한 연구와 강학을 통해 조선 성리학의 수준을 격상시킨 학자로 평가받는다. 기대승과의 논쟁은 조선 전역으로 파급되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며, 향약 제정과 서원 건립은 성리학적 정치관이 곳곳에 퍼질 수 있도록 하였다. 그의 인품과 처세 또한 동시기 여러 지식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후세 학자들에게도 좋은 모범이 되었다. 또한 그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남인은 조선 후기 정치의 큰 축으로 활동하였다.
사화의 시대
퇴계 이황이 태어난 16세기 조선 정치는 사화로 인해 매우 혼란했다. 전반적으로 본다면 의리와 도학을 내세운 새로운 정치집단인 사림이 정계 전반으로 진출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 질서가 점차 태동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의 반발은 매우 거셌다. 이러한 반발은 결국 사림이 큰 피해를 입은 사화로 드러났다.
1498년(연산군 4) 첫 사화가 벌어졌다.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빌미가 되어 김종직의 문인 김일손이 사형당하고, 김굉필, 정여창 등이 처벌받았으니, 바로 무오사화이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된 자를 처벌한 갑자사화가 벌어졌다. 당시 김굉필 등이 죽음을 당하였고 연산군은 이미 죽은 이들까지 부관참시(剖棺斬屍 : 관을 파내어 시신을 참하는 형벌)하도록 명하였다. 박원종, 성희안 등은 중종반정을 일으켜, 민심을 잃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조선]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새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사림계 인물을 대거 등용하여 정국을 일신하려 하였다.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은 이 때 중용되어 소격서 혁파, 현량과 실시 등을 통해 성리학적 정치 질서를 구현하려 하였다. 그러나 반정공신 녹훈 삭제 문제로 훈구파와 크게 대립하였고 결국 1519년(중종 14) 조광조, 김식, 기준 등이 죽음을 당하였다.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1545년(명종 즉위)에는 명종[조선]의 외삼촌 윤원형과 인종[조선]의 외삼촌 윤임 등 외척 세력의 대립으로 을사사화가 벌어져 또다시 사림파 인물들이 해를 입었다.
성리학적 정치 질서의 실현을 위한 사림의 분투는 계속되었으나, 기존 기득권 세력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시대는 새로운 인물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무신 집안의 막내 아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스승인 이황은 무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퇴계의 선대는 진보에 살았으므로 본관을 진성이라 하였다. 이황의 6대조 이석은 진보현의 아전으로 있다가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5대조 이자수는 고려조에 관직이 판전의사사에 이르렀는데, 특히 홍건적 토벌에 무공을 세워 송안군에 봉해졌다. 또한 그는 왜구의 침략을 피해서 진보에서 안동 주촌으로 이사하여 살기 시작했다. 이는 이황의 가문이 안동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된다.
이황의 고조부 이운후는 군기시부정을 지내고 사복시정에 추증되었다. 증조부 이정은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던 무인으로, 세종대에 여진족 정벌에 큰 무공을 세웠다. 이후 한산군수, 선산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셋째 아들 이계양이 바로 이황의 조부로, 이황의 고향 예안현 온계리로 옮겨 온 주인공이다. 그는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더 이상 과거 합격에 뜻을 두지 않고 시골에 은거하여 후손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후일 이황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강학에 몰두한 것은 그 조부에게서 물려받은 가학 전통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무신 집안에서 이황과 같은 대학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 또한 이계양의 공이 크다. 그의 두 아들은 이계양의 교육으로 인해 뛰어난 학자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계양의 첫째아들이자 이황의 부친인 이식은 특히 학문을 좋아하였다. 공부에 전력하기를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찾고 굶주린 자가 밥을 찾듯이 하였다. 옛것을 상고하는 데에 힘을 써 경사와 제자백가를 밤낮으로 연구하였다. 학문이 점차 증진하면서 동생 이우와 함께 학자들에게 칭송받았으며, 특히 박학다식함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황의 숙부인 이우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 사간원사간 등을 역임하였으며, 중종반정 당시 분의정국공신이 되었다. 이후 호조참판,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황의 선조 중에서는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른 셈이다. 또한 이우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이황에게는 아버지이자 스승의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했다. 대학자가 성장할 여건은 마련되어 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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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에 대해 2편
도학에의 정진
이황은 1501년(연산군 7) 11월 25일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식은 본래 의성 김씨에게 장가를 들었으나, 의성 김씨는 2남 1녀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춘천 박씨에게 다시 장가들어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그 막내가 바로 이황이다. 그러나 이황이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부친 이식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황의 친모 춘천 박씨는 졸지에 장가든 첫째를 빼고도 6남 1녀에 달하는 자녀들을 떠맡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박씨는 오히려 자녀들의 교육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박씨는 농사와 양잠에 힘을 써서 가세가 기울어지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공부에도 돈이 필요한 법, 근검절약하면서도 자녀들 교육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때가 되면 학비를 내어 취학을 시켜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문장 뿐 아니라 특히 몸가짐과 행실을 삼가는 것 또한 중요시하였다. 과부의 자식이라 행실이 불량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이러한 부인의 가르침 덕분일까, 이황은 예의 바르고 우애 있는 아이로 자라났다.
이황은 6살 때에 처음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아침이면 일어나 단정한 태도로 전날 배운 것을 외워본 후에 엎드려 가르침을 받았다. 어른을 대할 때면 항상 공손한 태도로 대하였으며, 밤중에 깊이 잠들었다가도 어른이 부르면 곧 깨어나 대답하였다고 한다. 8살 때 둘째 형이 칼에 손을 베였는데 이황이 이를 붙들고 울자, 부인이 손을 다친 형도 울지 않는데 왜 우느냐고 물었다. 이황은 이에 피가 저렇게 흐르니 왜 아프지 않겠냐고 대답하였다. 이황의 인자한 마음과 우애로움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12살부터는 숙부 이우에게 『논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이라는 글자의 뜻을 탐구하다가 이우에게 물었다. “모든 일에 있어 옳은 것이 바로 이입니까?” 이우는 이를 듣고 벌써 글의 뜻을 알았다면서 기뻐하였다. 이우는 이황과 그의 형 이해를 두고, 죽은 형이 이 두 아들을 두었으니 죽은 것이 아니라며 칭찬하였고, 또한 이황에게 가문의 미래를 이끌 것을 기대하였다.
이황은 점차 성리학에 정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9세 때 숙부 댁에서 『성리대전』을 접하였다고 한다. 도학으로의 정진에 뜻을 두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그는 성리학의 정수를 접하고서는 마음이 기쁘고 눈이 열린 느낌이었다고 술회한다. 일생 동안 추구해야 할 학문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깨달은 것이다.
23세 때 이황은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조선]에 처음 유학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기묘사화 직후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최고 교육기관이라는 성균관마저 그 혼란함에서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이황의 엄격한 행동거지는 찬사의 대상이 아니라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선비의 기상이 땅에 떨어진 시기에는 올바른 행위도 겉치레에 불과했던 것이다. 실망한 이황은 결국 두 달 만에 성균관을 떠났으나, 서울로의 유학이 소득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후일 저명한 학자로 성장하는 김인후를 만나 교분을 나누었던 것이다. 당시 김인후는 이황을 영남의 수재로 칭송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이 때 『심경』이라는 또 다른 성리학의 고전을 접하였는데, 이 역시 이황의 학문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황은 33세인 1533년(중종 28)에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23세 때 유학한지 10년만이었으나, 여전히 당시 성균관의 선비들은 과거를 중시하고 도학을 경시하는 풍조를 가지고 있어, 이황의 뜻과 부합하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그러나 기풍이 조금씩 변화하고는 있었는지 진중한 언행마저 비웃음거리가 되었던 10년전 에 비해, 많은 선비들이 퇴계의 학식과 언동을 존경하며 따랐다고 한다. 이황과 같은 인물들이 시대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해 가을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이황은 여주에 거주하던 김안국을 방문하였다. 김안국은 김굉필의 문인이며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던 인물이다. 이황은 그를 찾아뵌 후 비로소 정인군자의 언론을 들었다는 감회를 표출하였으니, 이황이 학문과 정치에 있어 어디에 뜻을 두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혼탁한 벼슬길에서 고군분투하다
퇴계 이황은 1534년(중종 2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49세 사직서를 제출한 시기까지 이황은 벼슬살이에서도 그 학문과 인품으로 성공한 축에 속했다. 그러나 사화가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에, 이황의 벼슬길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황은 1521년(중종 16) 21세 때 결혼한 허씨가 1527년 세상을 떠나자 1529년 안동 권씨에게 다시 장가를 들었다. 이황의 장인인 권질은 정언 권전의 형이었는데, 권전은 기묘사림으로 기묘사화 당시 파직된 후 안처겸의 옥사에 연루되어 죽었다. 이황은 승문원부정자로 있다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발탁되었는데, 당시 간관이 권력층의 사주를 받아 이황이 권질의 사위라는 것을 이유로 사관이 될 수 없다고 비난하였다. 결국 이황은 사관에 임명되지 못하였다. 이는 당시 실권자 김안로가 만나보자 청하였으나 이황이 이를 거절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존 권력층은 새로운 정치 질서를 대표하는 일군의 학자들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이황은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535년에는 호송관에 임명되어 왜노를 동래까지 이송하기도 했는데, 당시 여주의 목사로 있던 이순과 신륵사에서 노닐며 『황극경세서』와 『참동계』에 대해 논하기도 하였다.
1536년에는 호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에는 모친 박씨의 상을 당해 1539년까지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탈상한 후에는 다시 벼슬에 나아가 홍문관부수찬,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경연에 들어 수차례 임금의 행동거지에 대한 간언을 올리기도 했으며, 외척의 득세를 경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종 말 다시 정국이 혼란해지는 기미를 보였으며, 퇴계 또한 벼슬살이를 계속하려는 마음을 버리기 시작하였다.
중종과 인종이 잇따라 승하하면서 어린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윤 일파와 소윤 일파 등 양대 외척 세력이 권력을 두고 다투기 시작하였다. 결국 을사사화가 일어나 여러 선비들이 희생되었으며, 이황 또한 을사사화를 주도한 이기의 계략으로 인해 관직이 잠시 삭탈되기도 했다. 결국 그는 외척이 들끓는 중앙 정계를 벗어나 지방에서 인재를 육성하여 이 인재들을 통해 중앙의 정치 질서를 바꾸고자 하는 원대한 기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548년(명종 3) 이황은 외직을 요청하여 단양군수로 부임하였다. 10월 넷째 형 이해가 충청감사로 부임하면서 상피제로 인해 풍기군수로 옮겨갔다. 지방관으로서 이황은 고을을 정성스럽게 다스리고 백성을 측은히 여겨, 정사가 청렴하고 간결하였기 때문에 아전이나 백성들이 모두 편하게 여겼다고 한다. 1549년 12월에는 백운동서원에 편액과 서적을 내려줄 것을 감사에게 청하였다. 군의 북쪽에 위치한 백운동은 고려 때의 문성공 안유가 살던 곳으로, 이전 군수 주세붕이 서원을 세워 안유를 제사하고 여러 선비들로 하여금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하도록 하였다. 이황의 요청에 감사 심통원이 조정에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소수서원’이라는 이름과 판액,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의 책을 내려 주었다. 조선 시대 사림 중심 정치를 대표하는 서원의 흥성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혼탁한 중앙 정계를 대신하여 지방에서 사림을 육성하고 궁극적으로 중앙 정계의 혁신까지 가져오고자 한 이황의 의도를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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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하면 떠오르는 그 사람!
붉은 옷의 의병장
곽재우의 생애
1552년∼1617년. 조선의 문신이자 의병장.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고향에 내려와 있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신출귀몰한 유격전으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의 의병활동은 경상우도지역과 전라도가 보전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조정에서 내리는 높은 관직보다는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일본군들을 물리치고 전쟁을 극복할 것인가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전쟁 이후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정치적 분쟁에도 관여하지 않은 채 조용히 여생을 마감했다.
임진왜란 이전 곽재우의 삶
선조대는 성리학의 사상적 심화가 본격화된 시기였다. 또한 지방에서 세력 기반을 다져 오던 사림들은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사림 세력 사이에서도 학술적, 정치적 견해차로 인해 붕당이 형성되기도 했다. 곽재우는 그 중에서도 남명 조식의 학풍이 강했던 지역인 의령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현풍이고, 자는 계수이며, 호는 망우당이다. 곽위의 증손으로, 조부는 곽지번, 아버지는 곽월, 어머니는 진주 강씨이다. 외조부 강승두는 의령군 유격면 세간리 일대에 대대로 거주해 온 부호였다. 곽재우의 부친은 이곳으로 이사하여 용연정을 짓고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고 곽재우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곽재우는 16세에 김행의 딸과 결혼했다. 곽재우는 조식의 외손녀사위가 되었으며, 김우옹과는 동서 사이가 되었다. 그는 처외조부인 조식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유학경전 뿐 아니라 천문과 지리, 무예서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는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했으나 지은 글이 선조의 뜻에 거슬린다 하여 며칠 만에 합격이 무효가 되었다. 이후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고향에 내려와 평생을 은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임진왜란 발발과 곽재우의 활동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조선의 관군이 일방적으로 패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곽재우는 4월22일 자신의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해 7월에 유격찰방에 임명된 후 곧 형조좌랑에 올랐다. 10월에는 절충장군이라는 관품으로 승진하였고 조방장에 임명되었다.
곽재우가 처음 의병을 일으킬 때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수가 적었다. 그러나 재산을 털어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병사들의 가족까지 돌보았고 오직 나라를 구하기 위한 마음으로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자 곽재우를 따르는 의병들은 점점 늘어나서 천 여 명에 이르렀다.
자신을 따르는 의병의 수가 늘어나자 전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참모를 선정하고 명령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삼가대장에는 윤탁, 도총에는 박사제, 수병장에는 오운, 이운장, 선봉장에는 배맹신과 심대승 등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의병은 조선의 정규군이 아니었다. 장수나 지방관이 아닌 자가 군사를 거느리는 일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당연히 관아에 있는 곡식을 취해서도 안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직한 성품의 곽재우가 경상도 관찰사 김수를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 하여 맹비난 하자 둘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 갈등은 김면과 김성일이 중재하였다. 조정에서는 김성일을 김수와 교체했고, 김성일은 곽재우의 활동을 지지해주었다.
곽재우는 성에 들어가서 백성들과 함께 일본군의 공격을 방어하기보다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일본군을 공격하는 유격전, 혹은 복병전을 선호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 하여 아군 뿐 아니라 적에게도 위엄을 보이고, 홀로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하거나 위장 전술을 펴거나,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그의 뛰어난 전술적 능력과 함께 자신의 거주지인 낙동강 근방의 지리를 꿰뚫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출귀몰한 그의 전술은 일본군을 더욱더 겁에 질리게 했다. 정암진에서 안코쿠지 에케이의 부대와 접전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현풍, 창녕, 영산에서의 전투를 통해 지역을 회복했다. 뿐만 아니라 김시민의 1차 진주성 전투에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경상우도지역의 백성들은 그의 활약 덕분에 평시와 같이 농사를 짓고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일본군의 전라도 지방 진출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593년(선조 26) 12월에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산성수축 등 방어태세 구축에 힘을 기울였다. 1595년(선조 28)에는 진주목사로 전임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1597년(선조 30) 강화교섭이 결렬되고 일본군이 재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비로소 조정의 부름에 응하여 경상좌도 방어사의 직임에 나아갔다. 현풍의 석문산성을 수축하던 중, 7월 재침이 시작되었고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옮겨 성을 방어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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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말고 승병장!
전장에서 백성을 구하다
사명대사 유정은 조선중기에 활동한 불교 승려이다. 명종대 승과에 합격하여 직지사 주지 등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청허 휴정의 적전으로 평가받았으며 17세기까지 불교계를 주도하는 사명문파를 형성하였다.
성장과 출가
유정은 7세 때 할아버지로부터 『사략』을 배우고 13세 때 유촌 황여헌에게 『맹자』를 배웠다. 비명에는 이와 같은 세속학문의 한계를 느껴 출가하였다고 되어 있지만 실은 출가 사유가 그 뿐만은 아니었다. 유정은 15세 때 먼저 어머니를 잃고 16세에는 아버지를 잃어 황악산 직지사의 신묵화상에게 출가하게 된다.
출가한 후에 『전등록』을 배웠는데 배운지 오래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 뜻을 깨우쳐 나이가 많은 승려들이 오히려 유정에게 와서 물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출가 전에 유정이 얼마나 학문적 이력과 소양을 깊이 쌓았는지 시사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유정은 출가한지 불과 2년만인 18세에 신유년(1561, 명종 16) 선과에 합격하였다. 유정이 갖추었던 이러한 식견과 재능으로 인해 당시의 여러 저명한 유학자 문인들, 예컨대 박순, 이산해, 고경명, 최경창, 허봉, 임제, 이달같은 인물들과 교류하게 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유성룡의 문집인 『서애집』에서는 유정이 시에 능하고 해서와 초서도 잘 써서 승려들 사이에서 이름이 높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유정은 직지사 주지 등을 역임하고 선종본사인 봉은사[서울] 주지로 천거되나 이를 사양하고 32세의 나이에 묘향산 보현사에 은거하고 있던 휴정[서산대사]을 찾아가 3년간 참선에 몰두하게 된다. 이후에는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 금강산 등을 유력하며 수행하였으며, 1586년(선조 19) 옥천산 상동암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스승 휴정과 함께 관아에 갇히기도 하였으나 지역 유생들의 상소로 무죄 석방되었다.
활동과 업적승병장 활약과 전쟁포로의 송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유정은 금강산에 머물고 있었다. 전세가 급박해 지고 급기야 선조가 궁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정은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군 천오백 명을 모아 순안 법흥사로 갔다. 휴정에게 합세한 오천여 명의 의승군 세력은 그 여세를 몰아 명나라 군대와 함께 왜적에게 함락되었던 평양성을 수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승군이 보여준 조직력과 혁혁한 성과는 임금과 조정 대신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유정은 휴정의 수제자로서 전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충의의 승려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유정은 휴정을 대신하여 전투에 직접 참여하였고 군량 조달 및 산성 축조 등 전쟁 지원 사업과 관련하여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일본군과의 강화교섭 과정에서 조정을 대표하여 파견되었고 정세를 분석하여 대비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승병장의 역할은 물론이고 전쟁이 끝난 후에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왜로의 사신으로 파견되어 국교 재개와 잡혀간 조선인 포로 송환 등에 있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도총섭을 역임한 유정의 공로는 선조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 선교양종판사의 직책과 종2품 당상관인 가선대부와 동지중추부사 등을 제수받았다.
승려에게 당상관을 제수하는 일은 당시로서 매우 파격적인 조처였으며 임진왜란에서 유정과 불교계의 공로가 컸음을 조정에서 인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610년(광해군 2)에 세수 67세, 법랍 53세로 입적하여 해인사 서쪽 기슭에 다비하였다. 18세기에 임진왜란기 의승병장의 활약을 높이 평가받아 휴정과 유정 등을 향사하는 국가 공인 사액사가 지정되었다. 유정을 향사하는 곳은 밀양 표충사로 1739년(영조 15) 왕명으로 사액되었다. 이후 스승 휴정을 향사하는 사당으로 1789년 해남 대둔사와 1794년 묘향산 수충사가 사액되자 유정도 휴정 옆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운대사 분충서난록」 과 『사명대사문집』이 남아있다.
출처 - 우리역사넷 -